[백남준의 삶과 예술]"빌 클린턴은 내 아이디어를 훔쳤다"

  • 입력 1999년 12월 8일 18시 45분


1992년 미국대통령 선거운동 기간 중 빌 클린턴과 앨 고어는 당시 미국경제를 회생시킬 수 있는 대안의 하나로 ‘데이터 초고속도로’(Data Superhighway)의 설립을 강력하게 주장하여 큰 호응을 얻었다. 이 아이디어의 발상은 원래 50년대 미행정부가 미국 내‘각주간의고속도로’(Interstate Highway) 건립을 추진하던 사실을 연상하면서 제안된 내용이었다. 후에 이 계획은 정보초고속도로로 명명되었으며 의회에 무려 50억 달러의 예산이 제출되었다. 이 프로젝트가 클린턴 행정부의 최대 역점사업이 된 것은 물론이었다.

빌 클린턴이 대통령에 당선되어 취임식을 갖던 날, 그의 취임사 속에는 “미국 전역을 광케이블에 의한 정보 초고속도로의 국가로 만들겠다”는 대통령으로서의 새로운포부이자약속이가장 중요한 대목에 들어 있었다. 백남준은 클린턴의 이말을 듣는 순간 한동안 머릿속이 착잡해지다가 이내 엉뚱한 작품을 구상하기 시작하였다. 작품제목은 이러하였다.

“빌 클린턴은 내 아이디어를 훔쳤다”

백남준이 클린턴의 취임사에 나타난 이 말을 민감하게 받아들인 이유는 이러하다. 그는 1973년에 제작한 비디오테이프 ‘글로벌 그루브’(지구의 선)에서 이미 전자문화에 의한 지구촌 정보교환과 소통장치의 시대를 예고하였다. 소통장치는 바로 지구촌 전역을 광케이블로 연결하는 전자정보장치를 지칭하였으며 정보교환은 텔레비전이나 인공위성을 통한 인류의 하나됨을 예고한 것이었다.

그는 당시 ‘글로벌 그루브’의 의미를 설명하는 글에서 “내가 제안하는 새로운 ‘정보초고속도로’는 대륙적 인공위성뿐만이 아니라 강력한 전송망으로 작동되는 텔레커뮤니케이션 네트워크이며 레이저빔과 광섬유에 의해 구축될 것이다”라고 쓰고 있다. 그의 놀라운 예측은 하나도 틀리지 않았다. 클린턴의 정보 초고속도로에 대한 언급이나오기20년 전에,그리고 그것이 실천되기 20년 전에 백남준은 이미 새로운 시대의 정보망을 예고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백남준은 기술중심의 정보초고속도로가 인류의 꿈을 해결하는 능사가 아님을 알리는 토까지 달았다.

▼인간을 위한 소통의 문화▼

“그렇다고 정보 하이테크가 만병통치약은 아니다. 그것은 국부적 마취제에 불과하다. 따라서 예견할 수 없는 많은 일들이 일어날 것이다”

백남준은 이어 다음해인 1974년, 뉴욕의 록펠러 재단에 비디오에 의한 ‘전자초고속도로(Electronic Super Highway)’ 프로젝트를 응모하여 1만2천달러의 제작비를 후원 받았다. 당시 그의 아이디어는 독일에서 영어와 독일어로 3천부나 인쇄되어 유럽의 대학도서관 및 관계 요소에 배포되었으며 1976년 옥스퍼드 대학에 유학중이던 클린턴이 옥스퍼드 대학 도서관에서 이 글을 읽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 백남준의 생각이다. 당시 그가 썼던 글의 제목은 ‘후기산업사회를 위한 매체계획(Media Planning for Post―industrial Society)’이었다.

이 글에서 백남준은 “만약 뉴욕과 로스앤젤레스를 국내용 인공위성으로, 광케이블로 연결할수 있다면 그 경비는 달 착륙에 들었던 만큼이나 들것이다. 그러나 그때쯤 되면 장거리 전화는 거의 공짜나 다름없을 것이고 다중 텔레비전에 의한 케이블 회의도 가능할 것이다. 또 그렇게 되면 장거리 출장에 의한 항공료 절약은 물론 리무진을 타고 번화가를 누비는 폼잡는 문화도 변할 것이다”라고 강조하였다. 이러한 예언은 상당부분 적중하였다. 그렇다고 리무진 타고 폼잡는 문화가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아무튼 1984년이 되자 백남준은 정보 초고속도로에 대한 구체적인 일을 실천하였다. 그는 인공위성을 통해 지구촌을 하나로 묶는 인공위성프로젝트 ‘굿모닝 미스터 오웰’을 전세계에 방영함으로써 현대 인류에게 정보와 삶의 관계가 얼마나 결정적인가를 증명하였다.

백남준은 93년에도 대전엑스포로부터 초청을 받고 ‘인간화된 예술’, ‘정보화된 기술’에 대한 그의 이념을 다시 한번 펼쳐 보일 구상을 하고 있었다. 엑스포에 출품할 작품제목도 ‘정보초고속도로’로 정해놓고 있었다. 엑스포 전시마당 한복판에 운송과 정보의 상징인 자동차 30여대를 늘어놓고 자동차에는 온갖 색칠과 장식을 해놓았으며 자동차 내부에는 한복을 입고 선글라스를 쓴 마네킹 등의 오브제를 설치하였다. 정보초고속도로는 전자문화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인간을 위한 소통의 문화, 플럭서스 식의 휴먼 커뮤니케이션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굿모닝 미스터 오웰'서 입증▼

정보초고속도로에 관한 그의 예술적 작품은 매우 단순하며 대전엑스포와 같은 해인 93년 베니스비엔날레에서 다른 이미지로 전환되어 출품되었다. 백남준의 비디오예술이 정보와 참여를 주제로 한 것이라서 주목할 내용이기는 하나 그 것이 클린턴이 아이디어를 훔쳤다고 공개적으로 선전하고 다닐 만큼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도 아니다. 하기야 상대가 미국 대통령이고 보니 시사성이 크고, 또 한번쯤 예술적인 어필을 해볼만한 일이기는 하였다. 어쨌든 정보초고속도로의 원조는 백남준이 틀림없는 것이다.이 둘이 말하는 초고속도로에 대한 개념은 같아도 실천방법은 물론 크게 다르다. 그런데 백남준은 그 상대가 다름 아닌 미국대통령이라는 점 때문에 얼른 해학적인 작품제목을 생각해낸 것이다.

그런데 사람의 일이라는 것은 참으로 묘한 것이어서 클린턴이 아이디어를 훔쳐 갔다고 동네방네 떠들던 백남준이 바로 클린턴과 연관된 일에서 낭패를 당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여담 하나▼지난해 한국의 김대중 대통령이 미국을 방문했을때 백악관이 각계인사를 초청한 파티석상에서 웃지 못할 해프닝이 일어났다. 클린턴이 백남준 앞을 지나면서 악수를 하려는 순간 느닷없이 백남준의 하의가 벗겨진 것이다.

그러한 일이 고의로 일어난 일을 아니겠지만,어찌되었던 결과는 백남준의 주장과는 정반대로 되어버렸다. 즉 클린턴이 백남준의 아이디어를 훔친 것이 아니라 모니카 르윈스키와의 섹스 스캔틀에 시달리던 클린턴의 아이디어를 백남준이 훔친 꼴이 되었다. 아니면 피차 비긴 것일까.

이 사건을 놓고 국내 일각에서는 말도 많았다. 백남준이 일부러 연출한 또 다른 포퍼먼스였다는 설로부터 휠체어에 앉아있던 그가 일어서는 순간 느슨하게 입었던 바지가 벗어지게 되었다는 이야기 등 추측이 무성하였다. 그가 플럭서스 출신의 예술가라는 점에다가 워낙 예측불허의 일을 서슴없이 잘하는 예술가적 기질을 두고 나온 추측들이었다.

<글:이용우(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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