秦始皇은 일반적인 暴君과는 차원이 다르다. 그에게는 功過(공과)가 함께 있다. 그가 春秋戰國(춘추전국)의 500년에 걸친 혼란기를 마감하고 중국 최초의 통일국가를 형성했다는 점은 무척 중요하다. 또 모든 제도나 度量衡(도량형), 문자통일까지 이뤄 이후 중국이 거북의 등처럼 분열하지 않고 지금의 대국이 될 수 있었던 것도 모두 그의 공이다. 이는 긍정적인 평가다.
그런 점에서 그는 오히려 위대한 통치자였다고도 할 수 있다. 현재 ‘中國’의 영문표기인 ‘China’가 그의 ‘秦’(중국 발음 ‘친’)에서 유래했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우리가 秦始皇을 暴君으로 알게 된 것은 焚書坑儒(분서갱유·기원전 213∼212년) 때문이다. 물론 그의 치적 가운데서 빼놓을 수 없는 참극이기는 하지만 내막을 보면 일종의 통치 차원에서 행해진 조치임을 알게 된다. 그가 통치철학으로 삼았던 法家(법가)의 이념에 儒家(유가)는 맞지 않았으므로 그들을 제거하기 위해 내린 조치였다. 또 阿房宮(아방궁)으로 대표되는 奢侈(사치)도 있다. 그의 부정적인 측면인 것이다.
결국 이 때문에 暴君의 汚名(오명)을 뒤집어쓰고 만다. 그 뒤 秦始皇은 2년 만에 죽고 다시 3년 뒤인 기원전 207년 秦나라도 망했다.
정치권 일각에서 秦始皇에 대한 논쟁이 있었다. 미화하자는 의도가 아니라 바른 이해를 돕는다는 뜻에서 살펴보았다
鄭錫元(한양대 안산캠퍼스 교수·중국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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