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오후, 기자의 책상 위로 산더미같은 신춘문예 응모작과 함께 엽서 한장이 날아들었다. 청학동의 늦가을 풍경을 들여다본 뒤 엽서를 뒤집자 단정한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지리산에도 겨울이 왔습니다. 언제 바람처럼 휭하니 오십시오. 건강, 그리고 건필.”
출판사에서 잠깐 낯을 익힌 것이 전부라 의외였다.알고보니 그와 일면식이 있는 사람들은 종종 지리산 바람 내음 물씬한 그의 편지를 받는다고 했다.
지리산에서 독거(獨居)중인 시인 이원규.
그가 이번에는 독자들에게 소식을 보내왔다. 실천문학사가 펴낸 ‘벙어리 달빛’. 지리산 흙으로 반죽하고 달빛으로 숙성시켜 말간 햇빛으로 쪄낸 아포리즘과 시를 160여쪽의 아담한 책에 가득 채웠다.
하루에 한번 날개를 펴고 접는 결명자 잎이 한들거리고, 계곡의 물소리가 머리를 맑게 하는 곳, 시인의 거소인 피아(彼我)산방. 그곳은 ‘너(彼)와 나(我)의 경계를 허무는 곳’이라고 소개된다. 시인은 사람이 나무와 풀과 바람이 되는, 만유 합일의 삶을 그곳에서 꿈꾼다.
‘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천왕봉 일출을 보러 오시라/삼대째 내리 적선한 사람만 볼 수 있으니/아무나 오지 마시고/원추리 꽃무리에 흑심을 품지 않는/이슬의 눈으로 오시라’(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유윤종기자〉gustav@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