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독서]'멀티미디어 인간 이상은 이렇게 말했다'

  • 입력 1999년 12월 24일 21시 20분


▼'멀티미디어 인간 이상은 이렇게 말했다' 김민수 지음/ 생각의 나무/ 318쪽 1만5000원▼

“그는 일상의 세계로부터 나와 ‘매초당 삼십만 킬로미터 빛의 속도’로 마음속 무한 공간을 질주하고 있었다…그가 횡단한 통로엔 끝없이 ‘이상한 가역 반응’의 불꽃이 튀고 있었고, 그는 데이터로 이루어진 벽을 타고 흐르는 문자와 이미지를 만졌다.”

70년전 이땅에 ‘멀티미디어 인간’이 있었다.

언어와 그래픽 이미지를 동시에 사용해 ‘하이퍼텍스트’로서의 시(詩)를 창안한 천재. 그의 이름은 김해경, 필명 이상(李箱)이었다.

그래픽디자인 등 시각적 텍스트를 읽어내는 독법(讀法)을 사용, 이상 시의 숨겨진 측면을 들여다본 책.

이상의 시가 ‘우주의 암호문’처럼 불가사의한 대상으로 취급돼 온 것은 무엇 때문일까. 시각 측면을 제외시킨 채 문자 텍스트의 의미다발로서만 작품을 읽어내려간 때문이라고 저자는 진단한다.

그의 대표시인 ‘오감도’를 펼쳐보자. 첫 연 ‘13인의 아해가 도로로 질주하오/(길은 막다른 골목이 적당하오)’는 마지막 연 ‘(길은 뚫린 골목이라도 적당하오)/13인의 아해가 도로로 질주하지 아니하여도 좋소’와 의미적으로 대립된다.그러나 두 연이 시각적으로도 대립된다는 점을 우리는 잊고 있지 않았는가.

나아가 ‘13인의아해는무서운아해와무서워하는아해와그렇게뿐이모였소’라고 선언함으로써 이상은 ‘아해’들의 모습속에도 무서운/무서워하는의 의미적 대립쌍을 만들어낸다. 10명의 아해들을 열거한 뒤 행을 띄움으로서 이상은 10과 13이라는 숫자의 공간적 황금비를 이뤄낸다.

그의 시에 나타나는 치밀한 공간 설계는 ‘선에 대한 각서’ 시리즈에서 정점을 이룬다. 이상은 비(非)유클리드 기하학의 곡률 개념을 문자로 표현하는 동시에 시각적 설계를 통해서도 이를 대립 또는 강조한다는 것.

이런 실험을 통해 그가 성취한 것은 무엇일까? 20년이나 지나 서구 시단은 30년대 이상의 시도와 흡사한 ‘구체시’운동을 펼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저자는 오늘날의 구체시도 이상이 도달한 수준에 미치지 못한다고 단언한다.

언어와 그래픽 이미지를 대립시켜 의미 발생을 지연시키는 ‘해체 미학의 다중성’이 이상 시의 고차원적 특징을 이루는 데 비해,현대의 구체시는 단어들의 ‘군집성’이 만들어 내는 단순한 시각 이미지 차원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

책의 서론격인 1∼4장에서 저자는 ‘이미지 시대’에 인문학이 갖는 위기의식을 허구라고 꼬집는 한편 예술 인문과학 기술의 경계를 허무는 ‘학제간 연구’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저자는 책의 핵심부분인 ‘시각 예술의 관점에서 본 이상 시의 혁명성’을 98년 서울대 미대 교수 재임용 심사용으로 학교에 제출했다. 학교측은 ‘연구 내용 부실’로 저자를 재임용에서 탈락시켰다. 이 논문은 ‘학제간 연구의 주목할만한 성과’로도 평가됐으며 이듬해 시각언어와 그래픽 디자인 분야를 다루는 국제학술지 ‘비저블 랭귀지’에도 게재됐다. 318쪽. 1만5000원.

〈유윤종기자〉gustav@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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