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기론 학파 아니다"▼
번역자인 조남호씨(서울대 철학과강사)는 “비록 저자가 식민지 관료로서 조선 침략을 정당화하기 위해 쓰긴 했지만, 그가 제기한 철학적 문제는 아직도 우리에게 해결과제로 남아 있다”고 말한다. 그는 “특히 조선철학사는 지나치게 어려워 제대로 연구된 것이 없다는 점에서 이 책은 의미가 있다”고 주장한다.
다카하시는 “두 사람(이황과 이이)의 이기설(理氣說)에서 가장 근본적이고 중요한 차이는 선한 정(情)과 악한 정의 근원을 주로 이(理)쪽에 두는가 기(氣)쪽에 두는가에 있다”고 주장한다. 이에 근거해 퇴계 이황과 그 학파의 설을 ‘주리론’, 율곡 이이와 그 학파의 설을 ‘주기론’이라고 한다.
▼'퇴계-율곡학파'라고 해야▼
이에 대해 조씨는 “이황이 이기(理氣)의 대립을 이(理)에 중점을 두어 돌파하려 하고, 이이가 이기의 대립을 기에 중점을 두면서 해결하려 한 것에 주목한 것은 다카하시의 공헌”이라고 인정하면서도 “조선에서는 욕망을 긍정하는 ‘주기론’은 학파로서 존재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대다수의 조선 지식인은 ‘주리론’ 일색이었고, 그 사이에서 일어난 논쟁도 주리론 내부의 견해 차이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조씨는 주리 주기론이라는 다카하시의 도식을 비판하면서, “강조해 두고 싶은 것은 퇴계학파와 율곡학파를 ‘고유 명사’로 정의해야 한다는 점”이라고 전제하고 “이 점은 조선 철학연구자들이 앞으로 반드시 해결해야 할 과제”라고 주장했다.
한편 고 배종호씨(전연세대교수)와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윤사순원장 등으로 대표되는 기존 한국철학계에서는 조선유학사를 주리론과 주기론의 틀로 나눠 왔다. 윤원장은 “주리 주기로 나누어 보는 것은 다카하시에게서 비롯된 설이 아니라 본래 주희(朱熹)와 이황의 설이었고 조선후기까지 조선유학자들이 일반적으로 따르던 이론이다. 조선후기 실학자인 최한기의 경우에도 이 설을 따르고 있다. 선현들과 기존 학자들이 축적해 놓은 연구 성과를 이해하지 못한 채 지나치게 다카하시에만 집착하는 것이 문제”라고 말했다.
▼"학계선 합의된 개념"▼
윤원장은 “율곡학파를 주기론으로 보는 것은 율곡학파가 이(理)보다 기(氣)를 중시한다는 것이 아니라 퇴계학파에 비해 ‘상대적으로’ 기를 더 중시한다는 의미로 학계에서 이미 합의된 개념”이라고 설명했다. 주리론과 주기론으로 나누어 보는 틀이 완전한 것은 아니지만 이를 대치할 사관(史觀)도 없이 틀을 파기하고 학파마다 개창자의 호를 붙여 늘어 놓는 것은 조선유학사를 제대로 보는 관점이 아니라는 것이다.
〈김형찬기자〉khc@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