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아가야. 요즘 무척 피곤하지. 의사선생님이 운동을 많이 해야 널 쉽게 만날 수 있다고 해서 엄마가 많이 돌아다녔기 때문이란다. 편안히 잘 자고 내일 보자. 사랑해.”
98년 5월 결혼한 신씨가 밀레니엄 베이비를 낳겠다고 결심한 시기는 2월 말. 이유는? ‘처음’이란 것이 주는 마력 때문.
“첫사랑 첫키스 첫날밤 등 처음이란 것이 주는 무엇에 이끌렸어요. 새 천년의 문을 우리 아이가 처음으로 연다고 생각해봐요. 뭔가 새롭고 희망찬 느낌이 들지 않아요.”
남편(박기홍씨·35)은 국제통화기금(IMF)관리체제를 ‘핑계’대며 아기 낳기를 미루자고 했지만 신씨는 “나이도 있으니 더이상 미룰 수 없다”며 남편을 설득했다. 그리고 3월초 산부인과에 가서 건강검진을 받았다. 결과는 이상 무.
그 후 생리가 끝난 시점에서 2주 뒤인 4월12일부터 23일까지의 가임기간 동안 신씨 부부는 매일밤 ‘특별한 노력’을 기울였다. 남편은 술 담배도 끊었고 신씨는 유기농으로 재배한 야채를 즙내어 하루 3잔씩 마셨다. 딸도 좋지만 남편이 종가집 종손이므로 아들을 바란 것이 솔직한 심정.
한달 하고도 일주일 뒤. 남편 몰래 찾아간 병원에서 고대하던 대답을 들었다. 이날 저녁 남편은 동네가 떠나가도록 ‘와∼. 만세’하고 외쳤다.
종교도 없고 사주 점 등 미신도 믿지 않는 신씨 부부의 생활신조는 ‘자신의 삶은 스스로 개척하는 것’.
“1월1일에 태어나면 사주가 좋지 않아 여자는 남편과 이별수가 있고 남자는 출세길이 별로라는 말을 들었어요. 솔직히 처음엔 찜찜했지만 상관없어요. 새 천년의 희망찬 기운이 우리 아이를 지켜줄테니까.”
11월 초엔 출산준비를 위해 디자이너로 일하던 의류회사를 그만뒀다. 우선 배내저고리 우유병 가습기 젖병소득기 등을 사고 이불 요 천기저귀 베개 등은 직접 만들었다. Y2K에 대비해 동네병원에서 삼성제일병원으로 옮겼다. 제왕절개는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다. 명상분만법의 하나인 ‘소프롤로지식 분만법’을 배우기 시작한 것도 이 때문이다.
분만법 강의을 듣다 만난 또하나의 밀레니엄 베이비 예비엄마와 “혹시 서로 이성(異性)을 낳게 되면 ‘세기의 커플’을 만들자”고 농담반 진담반 약속했다.
유일한 걱정은 2000년에 태어날 애들이 너무 많아 대학입시 취직 결혼 등 각종 경쟁률이 높아질지도 모른다는 것. 이에 대한 대안도 마련했다. “1월생이니까 1999년에 태어난 애들과 함께 초등학교에 보내면 간단하게 해결되잖아요.”
신씨는 요즘 ‘즈믄둥이’로 태어날 아기를 위한 이벤트 준비로 즐겁다.우선 아들이든 딸이든 이름에 ‘천(千)’자 등 새 천년에 태어난 것을 기념해줄 글자를 넣을 생각이다.
“내 아이가 살아갈 2000년은 하얀 눈처럼 포근한 세상이었으면 좋겠어요. 그런 세상을 위해서는 나를 비롯한 어른들이 자기만 생각하는 마음을 버려야겠다는 생각도 해요.”
그래서 앞으로 10년 동안 1년에 불우한 이웃 200명씩 모두 2000명에게 1000원씩 아기 이름으로 성금을 보낼 예정이다. 그리고 아기가 세상의 빛을 보는 순간 해줄 말도 준비했다.
“나에게 와줘서 정말 고마워. 새 천년과 함께 시작되는 소중한 인생인 만큼 세상의 모든 사람에게 빛과 소금이 될 수 있는 사람이 됐으면 좋겠어.”
〈이호갑기자〉gdt@donga.com
▼생명의 신비 꼼꼼히 기록▼
초등학교때 방학숙제 말고는 일기 한 번 써본 적이 없다는 신씨. 그러나 임신을 처음 알게 된 5월6일부터 아기에 대한 기록을 적기 시작했다.
▽5월6일(임신5주)〓너를 처음 알게 된 날이다.내가 말로만 듣던 ‘밀레니엄 베이비’를 갖게 되다니! 누구라고 지칭할 수 없는 대상에게 “감사합니다”란 말이 절로 나왔단다.
▽6월7일(10주)〓초음파 사진에 찍힌 너의 모습을 보고 얼마나 신기했는지 모른단다. 산부인과 의사선생님에게 ‘이 시기엔 각종 기관이 생긴다’는 말을 듣고 생명의 신비를 느꼈단다.
▽8월19일(20주)〓태동을 느낀다. 내 몸속에 정말 네가 있구나 하는 느낌을 받는다. 엄마가 너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하나 생각해본다.
▽11월25일(34주4일)〓손과 발로 뻥뻥 차는 네 모습을 보면서 너에 대해 자꾸 바라는 마음이 생긴다. 삼촌처럼 의사공부를 하거나 숙부님처럼 판사가 되는 모습을 그려본다. 하지만 금새 그건 엄마의 지나친 욕심이란 생각이 든다. 아마 네가 모든 것이 정상이란 말을 듣고 나도 모르게 욕심을 내본 것 같다. 건강해서 정말 감사하구나.
▼'새 천년 첫아기' 어느 병원서 태어날까▼
우리나라에서 ‘밀레니엄 베이비’는 어느 병원에서 맨 먼저 태어날까.
현재 신생아가 가장 많이 태어나는 병원은 서울의 삼성제일병원 차병원과 부산의 일신기독병원. 세곳에선하루평균 23∼28명의아기가태어난다.
따라서 이들 3대 병원에서 밀레니엄 첫 아기가 태어날 가능성이 가장 높은 셈.
삼성제일병원은 밀레니엄 첫 아기의 조건으로 △병원관계자가 아닌 독립적 증인이 시간을 재야 하고 △유도분만이나 제왕절개 출산이 아닌 정상분만이어야 하며 △아기가 첫번째 호흡을 하는 시간을 출생시간으로 정하고 △사산아가 아닌 건강한 아이여야 한다고 밝혔다.
구독
구독
구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