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곡은 바이올린 소나타의 ‘제왕’으로 꼽히는 베토벤의 소나타 9번 ‘크로이처’와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이 연주되는 프랑크의 A장조 소나타 등 두곡.
요즘 아르헤리치의 행보는 이중적이다. 협주곡에서는 강건한 타건을 십분 드러내면서 작품의 건축적 토대를 튼튼히 쌓아올려 가는 데 공을 들인다. 최근 선보인 쇼팽의 협주곡음반이 좋은 예다. 반면 실내악에서는 완전히 자기나름의 독자적인 해석을 나타낸다. 강한 빛깔의 물감을 짜넣고, 섞지 않은 채 굵은 붓으로 마구 칠한다.
최근 바이올리니스트 크레메르, 첼리스트 마이스키와 호흡을 맞춘 차이코프스키와 쇼스타코비치의 3중주가 좋은 예다. 피아노의 강한 음색이 프레임 밖으로 비죽비죽 솟아나니 나머지 두 주자도 ‘혼신의 힘을 다해’ 개성대결을 펼친다. ‘협연’이라기 보다는 전투에 가깝다.
새 음반인 펄만 협연의 바이올린 소나타 음반도 이와 다름이 없다. 톨스토이가 동명 소설‘크로이처 소나타’에서 말했듯이 자극적이기로 유명한 ‘크로이처’에서는 템포를 바짝 당긴 가운데 두 사람의 접전이 벌어진다. 1악장, 피아노가 ‘해머 달린 악기’ 라는 점을 실감시키듯 아르헤리치는 저역을 깊이 두드려댄다. 강약대비를 최대로 하면서 죄었다 풀었다를 반복하는 두 사람의 경주는 마치 즉흥 재즈 연주를 연상시킨다. 그러나 아르헤리치가 ‘기(氣)’에서 앞서간다. 펄만은 서두르다 마침내 4분 20초 언저리에서 ‘삑사리(틀린 음)’까지 내고 만다.
반면 프랑크에서는 아르헤리치가 좀더 미소의 표정을 보내며 펄만을 돕는 편. 펄만의 활에 비치는 유연한 광택이 빛을 발한다. 다만 4악장에서 활의 속도를 더 다양히 바꾸어가면서 여러 가지 음색을 내비쳤으면 어땠을까.
결론. 두 곡의 만족할 만한 음반을 보유한 팬에게는 이 음반을 색다른 ‘별식’으로 권하고 싶다. 그러나 두 곡을 처음 듣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적극적으로 추천하기 힘들다. ‘크로이처’는 다비드 오이스트라흐의 전설적인 명연(필립스)이 있고, 프랑크는 우리의 젊은 연주자 김지연이 지어내는 예쁘장한 연주 (데논)도 좋다. ★★★☆ (별5개 만점, ☆=★의 절반)
<유윤종기자> gustav@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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