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웨이브 2000]氣學/물질문명의 폐해 치유할 대안

  • 입력 2000년 1월 16일 20시 26분


많은 사람들이 단전호흡이나 기공 등 ‘기(氣) 수련’을 통해 육체적 건강과 정신적 안정을 얻으려 한다. 국내의 기 수련 인구만 수 백만에 이른다는 주장이 있고, 중국에서는 파룬궁 이라는 기 수련의 추종자가 수 억명이나 돼 공산당 정부에 위협이 될 정도다. 자연과학 분야에서는 기가 에너지 위기를 극복할 무한에너지라며 연구에 매달리기도 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신비스런 종교 체험마저 ‘기 소통’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천의 얼굴을 가진 기. 수 천년 간 동양의 전통 속에서 변신을 거듭하다가 한동안 서구 근대사상의 위세에 눌려 사라지는 듯하더니 최근들어 또다시 새로운 부활을 꿈꾼다.

▽전통적인 기학(氣學)의 전개〓기학은 본래 동양에서 만물의 구성과 운동을 설명하는 전통적인 존재론이었다. 중국 고대 ‘주역(周易)’ 이후 다양한 모습으로 전개되던 기학은 11∼12세기 경 성리학의 등장으로 이학(理學)에 밀려 사상계의 주도권을 잃었다. 물질적인 성격이 강한 기보다는 상대적으로 원리적인 성격이 강한 이(理)를 만물의 가장 근본적인 요소로 보는 ‘이학’이 주류가 되고, 반면 기학은 비주류가 된 것. 하지만 그 동안에도 기학은 이학과 맞서면서 중국의 장자이(張載) 왕팅상(王廷相) 왕푸즈(王夫之), 조선의 서경덕(徐敬德) 임성주(任聖周) 등을 통해 오히려 이론적으로 더 세련돼 갔다.

이 때까지가 동양의 순수한 전통적 기학이었다면 17세기부터 서구의 학문과 접하면서 기학은 큰 변화를 겪기 시작한다. 19세기 초 조선후기 실학자 최한기(崔漢綺)는 서구의 학문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공부하면서 서양의 논리적 사유방법과 서술방법을 수용, 서구의 존재론과 비교하며 의식적으로 기학을 체계화했다. 그러나 거의 혼자서 연구를 했던 최한기의 작업은 그가 세상을 떠난 뒤 후대에 계승되지 못했다.

▽기학의 현대적 부활〓20세기 말 한국에서는 현대의 기학을 만들려는 시도가 나타났다. 현대의 기학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최한기 이후 단절됐던 기학의 계승 발전을 통해 데카르트 이후 정신과 육체 또는 인간과 자연을 분리해서 보는 서구 근대사상의 폐해를 바로잡는 새로운 자연철학을 만들려 한다.

현대에 와서 일찍부터 기학에 관심을 기울인 사람은 전 고려대 철학과 교수인 김용옥(金容沃). 그 역시 80년대부터 최한기에 주목했고, ‘노자(老子)’와 중국의 의학서인 ‘황제내경(黃帝內經)’ 등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리고는 인간의 ‘몸’을 통해 기의 문제에 접근한 한의학의 연구성과를 기학 연구에 활용하고자 한의학을 공부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현란한 문제제기와 의욕에도 불구하고 학문적으로 아직 별다른 성과는 나오지 못한 상태다.

김용옥의 친형인 고려대 김용준 명예교수, 서울대 장회익교수 등 계간지 ‘과학사상’을 중심으로 신과학에 관심을 가진 일군의 학자들도 신과학에 접근하는 하나의 방법으로 기학에 주목해 왔다.

이밖에 호서대 이현구 겸임교수, 안동대 김용헌교수 등 최한기의 철학을 전공한 학자들도 한의학자나 자연과학자 등과의 공동연구를 통해 기학에 대한 현대적 접근을 시도하고 있다. 최근에는 이정우 전 서강대교수가 서양사상 및 현대과학과 동양철학의 접목을 통해 새로운 기학을 만들고자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동서양 사상의 만남〓기학의 장점은 동양사상의 전통을 계승하면서 서양사상이 부닥친 한계를 극복할 돌파구를 마련할 가능성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정신과 육체를 나누는 데카르트 이래의 이원론은 서양의 물질 개념보다 훨씬 포괄적인 기 개념 앞에서는 무력하다. 자연과 인간을 나눠 자연을 대상화하는 서구의 근대적 자연관도 우주전체를 동일한 기로 설명하는 기학에 의해 대치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작업은 서양사상의 연구성과를 무시하고 동양정신의 부활만 외쳐서 될 일은 아니다. 서구의 근대사상을 수용해서 기학을 체계화한 최한기도 서구사상을 주체적으로 수용하려는 초기의 모습을 보였을 뿐이다. 기학연구자들은 반대로 서양에서 근대에 주류를 이뤘던 사상들의 한계를 인식하고 그 문제를 해결하려 고민했던 라이프니츠, 베르그송, 화이트헤드, 들뢰즈 등 서양철학자들의 연구나 카오스이론, 양자역학 등 현대과학의 성과들이 기학과 자연스레 가까워져 있음에 주목한다.

이들은 이러한 서양의 연구성과를 동양의 기학에 접목시킴으로써 인류에게 새로운 희망을 안겨줄 사상이 한국사상계에서 탄생할 것을 꿈꾼다.

▼氣學이란▼

‘기학’은 기(氣)라는 개념으로 자연과 인간과 문화를 포괄적으로 설명하는 철학적 담론이다. 기학에서는 우주의 가장 근원적 요소를 기로 보고, 기가 다양한 방식으로 모이고 흩어지는 것으로 만물의 생성 변화 소멸을 설명한다. 인간을 포함한 자연 전체가 동일하게 기로 이뤄져 있다고 보기 때문에, 자연을 인간으로부터 분리해 대상화하지 않고 오히려 인간을 자연의 일부로 간주한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자연을 대상화 또는 도구화하는 데카르트 이래 서구의 근대적 자연관이 근본적 문제점을 안고 있는 것으로 밝혀지면서 그 대안으로 주목받게 됐다. 서구 근대사상에서는 인간이 자연을 대상화해 자신에게 필요한 재화를 얻는 도구로 간주했고, 이런 사고방식을 따른 인간은 자연을 함부로 훼손하다가 현재 생태계 파괴의 위기에 직면하게 됐다. 이에 대한 대안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기학이 관심을 모으게 된 것이다. 기학자들은 자연과 인간을 통합적으로 인식하는 기학이 자연을 대상화함으로써 빚어진 생태계 파괴, 자원고갈 등의 문제에 해결책을 마련해 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기학은 우주의 가장 근본적 요소로서 질료적 성격의 기를 상정한다는 점에서 유물론적 성격이 강하다.

하지만 기는 만물을 직접 구성하는 질료의 성격을 가지면서도 서구 근대사상에서의 물질 개념과는 다르다. 기는 서양의 물질보다 함의가 크고 어떤 점에서는 정신마저도 포괄하기 때문에 기계적 유물론처럼 인간을 물질로 환원시키지 않는다.오히려 지각 신체 습관 감정 표정 등 인간의 섬세하고 구체적인 삶 자체를 설명해 낼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정신과 육체, 또는 법칙과 질료의 구분을 무의미하게 하는 사이버공간의 성격을 규명하고 이에 대처할 수 있는 사유틀을 만드는 데도 유용할 수 있다. 그러나 기 개념 자체가 포괄적인 만큼, 그 모호한 성격으로 인해 신비주의적으로 왜곡될 위험도 항상 있다.

▼재야학자 이정우씨▼

“이 시대에 필요한 창조적 철학의 작업에 전념하기 위해 교수직을 그만뒀습니다. 이런 작업을 학문적 성과로 인정하지 않는 학계의 풍토에 나 자신을 억지로 맞출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겁니다.”

서울대 공대 졸업 후 철학으로 전공을 바꿔 80년대부터 프랑스철학의 전도사로 이름을 날렸고, 94년에는 프랑스 사상가 미셸 푸코 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던 이정우(41·전 서강대 교수). 그는 현대 프랑스의 사유와 동북아시아의 사유를 통합하는 새로운 사유를 구상했다. 그것은 곧 기학(氣學)이었고 공인된 철학에 대한 충실한 해석 외에 새로운 시도가 잘 받아들여지지 않는 기존 학계에 맞서다 결국 재야학자로 나선 것이 3년째로 접어든다.

그동안 ‘시뮬라크르의 시대’ ‘삶·죽음·운명’ 등 자신의 강의록을 정리한 몇 권의 저서에서 단편적으로 자신의 구상을 드러냈던 이씨는 올 3월 출간 예정인 ‘접힘과 펼쳐짐’에서 본격적으로 자신의 생각을 펼쳐보일 예정이다. 그는 학문세계는 거침이 없다. ‘주역’ ‘황제내경’, 한의학, 최한기 이제마 등의 동양사상, 라이프니츠 베르그송 화이트헤드 들뢰즈 등의 서양철학, 프락탈이론 카오스이론 급변론 등 현대과학 이론 등 인류의 지적 보고를 누비고 다닌다. 그리고 이들에서 상통하는 점을 흡수해 가며 기학을 만들어 간다.

그는 이런 작업을 통해 자연과 인간문화가 양분되는 근대적 세계관을 극복하고, 가상공간 디지털 유전자조작 등 현대 사회에서 벌어지는 갖가지 현상들을 기학적 틀에서 점검하고 판단한다. 또 근대철학에서 소홀히 해 왔던 지각 신체 습관 감정 기분 기억 표정 말투 등 구체적인 삶이 담긴 하위층의 인식구조를 규명하려 한다. 또 한편으로는 전통 성리학에 기반을 두면서도 근대적 주체의 맹아(萌芽)를 보이는 정약용의 사상을 통해 사회 정치 윤리 등의 문제에 접근한다.

“다산에게 보이는 근대적 주체의 맹아는 서구사상에서와 달리 세계를 대상화하지 않기 때문에, 자연과 인간을 이분법적으로 바라보는 서구의 근대적 주체를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어요.” 현재 한의학자와 자연과학자 등과 함께 연구를 진행하고 있는 그는 이 거대한 연구작업을 위해 ‘환태평양 기학연구 연합’ 같은 협동 연구기구를 만들어 동서가 어우러지는 연구의 장을 만들겠다는 원대한 포부도 갖고 있다.

<김형찬기자> khc@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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