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책을 말한다]'지적사기' /한국 포스트모더니즘에 경종

  • 입력 2000년 1월 28일 19시 01분


▼지적사기/앨런 소칼, 장 브리크몽 지음/이희재 옮김/민음사/367쪽, 1만3000원▼

“프랑스 현대철학은 모조리 사기”라고 외친 미국의 물리학자 앨런 소칼(뉴욕대교수). 프랑스의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자들의 사유와 글쓰기는 모두 사기라고 비판과 독설을 퍼부었던 인물이다.

소칼이 현대 철학의 중심국임을 자부하는 프랑스 지성인들의 자존심을 사정없이 짓밟은 문제의 책 ‘지적 사기’가 번역되어 나왔다. 부제는 ‘포스트모던 사상가들은 과학을 어떻게 남용했는가’. 원저는 ‘Fashionable Nonsense’(1997)로, 출간 당시 미국과 프랑스 지식인의 자존심 대결을 불러일으켰던 바로 그 다‘ 벨기에 물리학자 브리크몽과의 공동 저작이지만 내용 대부분은 소칼이 쓴 것이다.

소칼의 말대로 프랑스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은 정말 사기인가. 아니면 프랑스 철학자들이 반격하듯 소칼의 주장이 사기인가.

만일, 프랑스 포스트모더니즘이 사기라면 그것에 열광했던 한국의 철학계 역시 사기에 놀아난 것은 아닌가. 지난 시대 유별나게 프랑스 철학과 사유체계에 매료되고 경도되었던 한국의 지식인사회와 철학계. 이 책이 우리에게 흥미롭게 다가오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소칼의 첫번째 비판을 보자.

“프랑스 현대철학은 언어의 유희다. 프랑스 철학자들은 계몽주의의 합리적 전통을 거부하고 자연과학 개념과 용어를 멋대로 남용하면서 모호한 주장으로 세계 지성계를 오염시키고 있다.”

소칼의 눈에 비친 프랑스 철학은 이처럼 엉터리 그 자체다. 자크 라캉, 장 보드리야르, 줄리아 크리스테바, 질 들뢰즈, 펠릭스 가타리 등 국내에도 널리 알려진 내로라하는 프랑스 철학자들이 줄줄이 비판대에 오른다. 보드리야르의 ‘복합굴절의 초공간’ ‘법칙의 가역화’, 라캉의 ‘위상 기하학’, 크리스테바의 ‘집합이론’ 등등을 예로 들면서 소칼은 “이들이 어설픈 학식으로 독자를 겁주고 있다”고 비판한다.

자존심 넘치는 프랑스 철학계가 가만 있을 리 만무했다. 철학자들이 사용하는 과학적 개념은 하나의 상징과 은유인데도 소칼은 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무지를 드러냈다고 반격했다.

소칼의 두번째 비판. 이는 현대 과학철학의 상대성에 대한 비판이다. 과학은 상대적이 아니라 객관적이고 절대적이라는 것이 소칼의 신념이다. 소칼은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자신의 상대주의를 정당화하기 위해 과학철학의 주제 개념 등을 제멋대로 사용한다”고 지적한다.

소칼의 비판은 이렇게 철학에서 과학으로 넘어가 과학적 진리라는 것이 절대적인가 상대적인가에 관한 논란으로 이어진다.

과학적 진리는 언제나 객관적이고 절대적이라고 믿는 소칼. 이에 반해 프랑스 포스트모더니스트(반소칼주의자, 과학상대주의자)들은 “과학의 단선적인 객관성을 잣대 삼아 인문학을 바라보려는 과학주의자들의 시각이야말로 또다른 권위주의” 라고 반박한다. 소칼의 주장은 과학자들의 위기의식의 발로에 불과하다는 반론도 있다. 즉 소칼의 ‘지적 사기’ 주장 역시 ‘또다른 사기’라는 주장이다. 과학 혹은 과학적 진리는 절대적인가, 상대적인가. 실은 이것이 지적사기 논쟁의 핵심이다. 이쯤에 이르니 소칼과 프랑스 철학자간의 논쟁은 더욱 복잡해진다. 누구 말이 사기인지 더욱 알 듯 모를 듯하다. 대체 이 책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중요한 점은 소칼과 프랑스 철학자간의 논쟁이 아니라 이 책을 바라보는 한국 지식인 집단의 태도, 매체의 비평 태도에 있다.

98년 이후 이 논란이 국내에 알려지면서 한국의 일부 지식인들과 많은 매체들은 소칼의 프랑스철학 비판에 옹호하는 태도를 보였다.이번 번역서가 나오고 나서도 분위기는 비슷하다. 여러 매체들은 소칼의 견해를 따라가는 식으로 이 책을 소개했다. 물론 “프랑스 사유의 거대한 전통과 독특한 분위기를 과학적 엄밀성 하나로 환원해 거세시키는 것은 무리”라고 반박하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지식인 사회와 그 주변에서 이렇게 소칼의 ‘지적 사기’의 손을 들어줄 자격이 있는가.

프랑스 철학, 포스트모더니즘이 한창 유행할 땐 포스트모더니즘을 외치면서 그 전파에 앞장서더니 이제 와서 소칼의 비판에 편승하여 마치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가 끝난 듯 소칼을 앞세우는 한국의 일부 지식인 사회와 그 주변. 문학 철학을 논하면서 명쾌한 이해도 없이 기하학이니 양자역학이니 하는 과학이론을 수도 없이 사용했던 이론가들. 과학의 틀에 갇혀, 시대 역사 문화에 따라 변하는 과학의 상대적 가치를 애써 무시해온 한국의 일부 과학자들. 이들 모두 자신있게 소칼의 편에 설 수 있을까.

이 책에서 촉발된 논란은 포스트모더니즘 찬반 논쟁의 차원을 넘어선다. 과학기술의 사회적 역할, 문화적 다원주의 등의 논란으로 나아가기에 충분하다. 그리고 한국으로 돌아오면 지식인들의 학문적 태도의 문제로 이어진다.

자, 과연 누구의 주장이 사기인가. 프랑스 철학자들인가, 소칼인가. 아니면 소신없는 한국의 지식인과 지적 풍토인가.

<이광표기자> kp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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