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조정장세로 돌아섰지만 작년 초 70대에 머물던 코스닥지수가 연말 250을 넘어서면서 주가도 수백에서 수천배까지 치솟았다. 이에 따라 우리 사회엔 코스닥시장에서 수억∼수천억원을 단순에 거머쥔 새로운 형태의 부자, 이른바 ‘코스닥크라트’
(KOSDAQ-CRAT·코스닥시장의 신봉자)가 급속히 형성되고 있다.
▼새로운 부의 특징▼
이들은 대부분 정보통신계 벤처 대기업 종사자나 이들 기업에 투자한 사람들. 남보다 앞서 경제활동의 최첨단에 선 사람들인데다 남들보다 먼저 패러다임의 변화를 읽는 안목을 가졌다는 점에서 70,80년대 땅투기로 돈 번 사람과 구별된다.
우리사주나 스톡옵션을 지니고 있는 이들은 실제로 돈을 손에 쥐고 있는게 아니라 아직은 ‘주식을 팔면’ 억대부자가 된다는 가정(假定) 속의 부자가 대부분. 우리사주를 아직 ‘현금화’하지않았거나 주가변동이 심해 2,3년뒤 스톡옵션을 팔때도 부자일지 미지수다. P씨 역시 “(한주도 팔지 않아) 실제로 손에 쥔 게 없어서인지 그저 얼떨떨할 뿐”이라면서도 “분명한 건 나의 가치가 요즘 ‘상한가’를 치고 있다는 점”이라고 했다.
이들 코스닥크라트는 예전에 비해 분명히 달라진 ‘신분’과 최근 번지고 있는 ‘반(反)벤처’ 정서 속에서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나, 떨고 있니?▼
금융사 직원인 K씨(32)는 “혼란스럽다”가 요즘 입버릇이다.
지난해 9월 전재산 5000만원에 다시 5000만원을 대출받아 투자한 1억원으로 30억원대 ‘자산가’가 됐다. 그러나 부모를 제외하고 동료는 물론 형제들에게도 이 사실을 말하지 못했다. 돈 때문에 마음이 상할까 걱정스러웠기 때문.
“처음엔 흥분해서 떠든 적도 있지만 후회하고 있어요. 주변 사람들에게 미안하잖아요. 삶의 의욕을 꺾는 일이죠. 샐러리맨 생활을 뻔히 아는데….”
씀씀이는 크게 변하지 않았다. 주가가 올랐다고 주위에 술을 사면 이튿날 어김없이 주가가 빠졌던 경험 때문인지 술도 산 기억이 없다. 미혼이므로 집장만을 위해 투자를 시작했으나 막상 돈이 생기니 집을 사고 싶다는 생각도 없어졌다.
K씨는 “아직은 돈에 익숙하지 않아 쓸 줄을 모른다”며 “이전엔 돈이 없어 ‘못하던’ 걸 이젠 ‘안하는’ 정도로 바뀐 것 같다”고 말했다.
▼안정과 여유▼
서울 강남구 대치동의 L호프에선 최근 코스닥에 등록한 H사의 동기 몇몇이 우리사주로 이야기 꽃을 피웠다. 주가가 떨어지고 있지만 걱정보단 여전히 기쁨이 앞선다. 현재 주가가 구입원가보다 높기 때문에 ‘생돈’을 들인 투자자에 비하면 마음이 여유롭고 안정된다.
“△△△는 오랜 꿈이던 미국 경영학석사(MBA)를 따려고 영어학원에 등록했대.”“○○○는 우리사주를 ‘조금’팔아 부모님의 주택대출금을 갚았다는군.”
현재 가치로 2억원의 우리사주를 갖고 있는 L대리(29·서울 송파구 신천동)는 “날이면 날마다 주식을 팔아 룸살롱에 다니는 동료도 있다”며 “씀씀이가 헤퍼질까 마음을 다잡는데도 이전보다 자꾸 택시를 타게 된다”고 걱정했다.
이날의 결론은 앞으로 살아갈 날이 수십년인데, 자질과 능력을 키울 수 있는 기회를 잃지 않게 서로가 지켜주자는 다짐.
“젊은날의 ‘횡재’가 내 삶을 망치면 안되지요. 큰 돈인건 맞지만 제 삶의 틀을 바꿀 만큼은 아니니까요.”(L대리)
▼정신과전문의 분석/富 관리방식 옛 '강남졸부'와는 차이날것▼
‘1억원이 생긴다면?’
소시민들이 곧잘 던져보는 질문. 만져보기도 힘든 이 돈이 실제로 생긴다면 사람의 마음은 어떻게 변할까.
정신과 전문의들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은 하나의 권력”이라며 “갑자기 큰 권력을 쥐게 된 심리와 동일할 것”이라고 말한다.
처음엔 다소간의 충격을 받기 마련. 문제는 이를 받아들이는 자세인데 권력을 조절할 만한 능력을 지녔다면 충격에 대한 반향도 크지 않다.
삼성생명 사회정신건강연구소 이시형소장(정신과전문의)은 코스닥크라트에 대해 “이들은 갑자기 부자가 됐다는 점에선 ‘강남의 땅부자’와 유사하지만 부를 관리하는 방식에서 큰 차이가 날 것”으로 예측했다. 판단의 근거는 이들이 상당한 지적수준을 지닌 ‘디지털 세대’라는 점.
이교수는 “인터넷으로 끊임없이 세계와 소통하는 이들은 자기생활에 충실하고 합리적인 사고방식의 소유자라는 점에서 미국의 ‘여피족’에 비유할 수 있다”고 말한다. 특히 이들은 ‘0과 1’의 디지털적 사고로 ‘마음의 구역화’을 잘하므로 부자가 된 것과 현실생활을 혼돈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삼성서울병원의 이동수교수(정신과)는 “복권당첨 등으로 큰 돈을 번 50명을 추적 조사한 미국의 한 연구 결과 소수를 제외한 대부분은 알코올중독이나 이혼 등 오히려 상황이 악화됐다”며 “행불행을 결정하는 건 돈벼락이 아니라 이런 변화를 수용하는 개인의 역량”이라고 강조했다.
<이나연기자>laros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