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국수전]루이9단 '盤上의 性혁명' 신화탄생

  • 입력 2000년 2월 1일 00시 11분


루이나이웨이(芮乃偉·38)9단의 얼굴이 떨렸다. ‘바둑황제’ 조훈현(曺薰鉉·48)9단이 무거운 침묵 속에 돌을 던지는 순간이었다. ‘반상의 철녀(鐵女)’ 루이 9단도 이 한판의 대국이 주는 감격은 견디기 어렵도록 벅찬 것이었다. 1월31일 오후 5시35분이었다.

이날 오전10시 서울 종로구 세종로 동아미디어센터 14층 인촌라운지 특별대국실에서 열린 조9단과 루이 9단의 43기 국수전 도전 3번기 제2국. 백을 쥔 조국수가 155수만에 돌을 내려놨다. 전문가들의 예상을 뒤엎은 루이 9단의 ‘예기치 못한 낙승’이었다. 1월17일 제1국에서 조국수가 비교적 쉽게 승리해 전문가들은 “루이가 여류최강이라지만 아직 조9단에겐 어렵지 않겠느냐”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예상은 예상으로 끝났고 이날 대국은 세계 바둑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사건’으로 남게 됐다.

조 9단이 누구던가? 제자인 이창호 9단에게 세계 바둑계 1인자 자리를 넘겨줬다지만 여전히 ‘거인’이다. 루이 9단도 대국에 앞서 “조 9단과 두판(2패)을 둘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영광”이라고 말했다. 루이 9단의 스승인 우칭위안(吳淸源) 9단과 조 9단은 사형사제지간. 루이 9단은 조 9단을 사숙(師叔)으로 불러야 하지만 언제나 ‘선생님’으로 부르며 존경심을 표시해 왔다.

루이9단은 “조국수는 가장 좋아하고 존경하는 기사여서 단순히 기쁘다는 감정보다는 좀 복잡한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바둑계에서는 루이 9단의 1승을 단순한 숫자 ‘1’로 보지 않는다. ‘반상의 성(性) 혁명’을 알리는 신호탄으로 여기는 것이다. 여성 기사가 여류 대회가 아닌 일반 기전 도전자로 나선 것도 처음이었고, 첫승도 당연히 초유의 기록이다. 한국바둑의 정상은 세계 정상이고, 그것도 최고의 전통과 권위를 자랑하는 국수전이어서 여느 무대와는 차원이 다르다.

이날 대국은 1차전과 마찬가지로 전투형인 두 기사의 기풍에 어울리게 접전의 연속이었다. 백을 쥔 조 9단이 초반 우상귀 흑진에 뛰어들면서 사활을 건 전투가 시작됐다. 또 중반 우상귀에서 중앙으로 이어지는 싸움에서 우상변의 흑과 중앙 백의 교환이 결국 승부를 갈랐다. 루이 9단은 중앙 흑의 두터움을 앞세워 백 대마를 계속 공격했고 마침내 조9단을 무릎 꿇린 것.

복기에 들어가자 루이의 곁에는 어느새 남편 장주주(江鑄久·39) 9단이 그림자처럼 다가와 있었다. 지난해 3월 한국에 정착한 루이 9단은 아직 바둑과 관련된 용어와 “몰라요” “고마워요” “김치찌개 좋아해요” 등 초보적인 우리말밖에 구사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는 외롭지 않았다. 대국장 밖에서 남편이 “루이, 힘내라”며 끊임없이 성원했기 때문이다.

▼한국기원 소속 '한국棋士'▼

루이 9단과 장 9단은 바둑없는 사랑이나 사랑없는 바둑은 생각할 수도 없고 생각하기도 싫은 듯하다. 1990년 당시 연인이었던 이들은 장 9단이 톈안(天安)문사태에 연루돼 망명길에 올라 헤어진 뒤 1992년 잉창치(應昌期)배 때 일본 도쿄에서 만나 냉수 한 사발을 떠놓고 결혼식을 올렸다. 그 대가로 세계 바둑계의 ‘유랑객’ 이 돼버렸다. 미국은 프로기사로서의 생활이 어려웠고 일본에서는 공식 활동이 허가되지 않았다. 바둑의 경우 기사의 국적을 따지지 않고 소속 기원이 있는 나라가 ‘국적’이 되기 때문에 루이9단부부는 한국에서 활동하고 있다.

장 9단은 “유랑객 시기가 가장 힘들었다”면서 “프로기사가 바둑을 마음껏 둘 수 없는 것은 살아있어도 사는 게 아니다”고 말했다.

영예의 국수위는 21일 오전 열리는 마지막 제3국에서 가려지게 됐다. 루이 9단 부부는 농반진반으로 ‘어제보다 좋으면 좋다’는 게 좌우명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루이9단의 ‘오늘’인 2국은 ‘어제’인 1국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김갑식·이원홍기자>gs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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