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거센 물결 속에 사회 분위기는 약육강식의 경쟁주의와 개인주의로 치닫고 있다. 이런 시점에서 광주대 이영석교수(사학)가 최근 출간한 ‘다시 돌아본 자본의 시대’(소나무)에서 자본주의의 종주국이라 할 영국의 ‘빅토리아적 가치’를 재조명하고 나온 것은 의미를 지닌다.
이교수는 영국의 근대사회경제사를 검토하며 19세기 중엽 영국의 사회 세력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던 ‘빅토리아적 가치’의 문제를 심사숙고했다. 당시의 빅토리아적 가치란 근면과 자립의 가치를 중시한 것으로, 사회 전체의 정신적 도덕적 진보를 이룩하려는 중간계급의 열망이 담긴 것이었다.
1859년 이런 사회적 분위기에서 나온 새뮤얼 스마일스의 ‘자조론(Self-help)’은 당시 그의 다른 저술들과 함께 일종의 ‘사회적 복음’으로 간주됐고 그의 생전에 수십만부가 팔릴 만큼 일반의 호응을 얻었다. 그는 개인의 변화가 국가나 다른 외부의 힘보다는 개인의 의지에 의해 이뤄지는 것임을 강조했다. 스마일스가 바랐던 것은 자기 발전을 위해 스스로 애쓴다는 단어의 뜻 그대로 자조를 통한 개인의 도덕적 정신적 향상이었다. 물론 당시에도 스마일스의 ‘자조론’에 대해 ‘중간 계급의 부에 대한 저속한 옹호론’이라는 비판도 있었다.
하지만 이교수는 스마일스의 ‘자조론’이 중간계급의 부에 대한 옹호론으로 집필된 것은 아니었다고 본다. 그는 “자조론의 배후에는 스마일스 자신이 급진적 개혁운동의 좌절을 겪은 후에 내면적 정신적인 자기 함양을 강조함으로써 그 좌절을 극복하려 했던 쁘띠부르주아적 유토피아 관념이 스며 있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스마일스의 생각과는 별개로 중간계급은 ‘자조론’을 사회악과 그들의 부의 축적을 합리화하는 식으로 해석했다. 그러면서도 노동자계급에게 자조의 가치를 설파할 때는 ‘후원에 의한 자조’라는 방식을 택했다. 물론 그것은 “궁극적으로는 중간 계급의 지배구조를 공고화하기 위한 온정주의적 전략의 일환”이었다. 이에 비해 노동자계급의 상층부는 전통적인 집단적 자조조직을 발전시켜 나갔으며, 중간계급의 자조운동과는 달리 노동조합이나 공제조합과 같은 협동적 자조운동을 전개했다.
빅토리아시대 중기 같은 자본주의 발전기에 널리 퍼져 있던 가치가 근면과 자립, ‘후원에 의한 자조’나 ‘협동적 자조’였다는 것은 자본주의의 원동력이 시장의 경쟁과 조절기능에만 있던 것이 아님을 드러낸다. 신제도학파에 속하는 1993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더글러스 노스도 자본주의가 시장의 기능만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님을 주장해 왔다.
그 의도가 어떠하든 근면과 자립을 권장하고 기업인의 사회적 책임을 요구하며, 조합을 통해 협동하고 록펠러나 빌 게이츠 같은 자본가가 자선단체에 수천억원을 기부하는 사회적 풍토가 자본주의사회 유지에 크게 기여해 왔다는 것이다. 호혜와 재분배의 원리를 주장했던 칼 폴라니나 사회적 평등의 회복하기 위한 차등의 원칙을 주장하는 존 롤스가 최근 다시 주목받고 있는 점도 같은 맥락이다. 거래비용의 효율성을 주장하는 유교자본주의나 선비적 지식인관료의 역할을 강조하는 유교민주주의 역시 이런 사회적 책임을 전제로 한다. 산업혁명의 부산물인 ‘자조론’은 세기들을 뛰어넘어 정보화혁명 시대에도 많은 것을 시사한다.
<김형찬기자·철학박사>khc@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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