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도 일이 남아있다면 그건 바로 일상과의 씨름이다. 그리고 어느 해 여름 혹시나 하면서 기다렸다가 한 달이 넘도록 서로가 욕을 퍼부었던 유월의 그날에서 다시 출발해야 한다. 우리는 희망을 가졌다가 절망했다가 김이 새서 모두 파편화시켜 버렸다. 노동자, 농민, 학생, 지식인, 종교인, 실업자…. 도무지 끝나질 않을 것처럼 주워 섬기다가 넥타이 부대를 끼워 넣었다. 그때에도 우리는 자신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것이 시민의 탄생이었는데도.
이제 감옥에서 나온지 한 달도 못되었는데 세상은 구제금융 대란이었다. 나는 독방에서 갖고 나온 속옷 몇 벌 뿐이라 가난해지는 것이 무엇인지 실감이 나질 않았다. 누구 말처럼 전깃줄에 앉은 참새도 다른 무리가 날아오면 일시에 날아올랐다가 다시 맞춤한 간격으로 재편성해서 앉는다. 공간의 혼란이다. 이 잠깐 동안의 날아 앉기에 잽싸게 끼우지 못한 것들은 다른 곳으로 뿔뿔이 날아가버린다. 이를테면 나는 혼자가 아니리라.
갈뫼에서 여섯째 날 아침이 밝았다. 나는 짐을 꾸렸고 내가 읽었던 윤희의 노트들을 가방 속에 넣었다. 라면을 끓여 먹었는데 밤을 새워서인지 혓바닥이 둔탁하고 면 가닥이 씹히지도 않고 입천장에서 맴돌았다. 독방에 있을 때처럼 설거지 해놓고 걸레를 빨아서 방바닥을 깨끗이 닦아냈다. 그리고 집을 나서기 전에 마루 방에서 그네가 그렸던 예전 나의 초상을 본다. 젊은 나의 초상을 보는 게 아니라 그네가 써놓았듯이 저 뒤편에서 내 어깨 너머로 바라보고 있는 것 같은 나이든 어머니 윤희를 바라본다.
다녀 올게.
나는 타향으로 출발하는 사람처럼 그렇게 중얼거렸다. 순천댁네 식구들과 인사를 나누고 과수원 길을 걸어 나와 다리목에서 버스를 타고 처음 찾아오던 모양 그대로 나는 갈뫼를 떠났다.
너희들은 어디로 날아가느냐
아무 곳도 아닌 곳으로
누구로부터 떠나왔느냐
모든 것들로부터
그들이 함께 있은지 얼마나 되었느냐고
조금 아까부터
그러면 언제 그들은 헤어질 것이냐고
이제 곧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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