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들어 국내 고고학계와 고대사학계의 가장 큰 이슈는 백제 초기 도읍지인 하남 위례성(河南 慰禮城)의 정확한 위치에 관한 것이다. 그 논의의 향방에 따라 백제사를 다시 쓸 수도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위례성의 후보로 거론된 곳은 경기 하남 춘궁리, 충남 천안 위례산성, 서울 송파구의 몽촌토성과 풍납토성 등.
그 논의는 조선시대에 시작됐다. 그러나 1980년대 전반까지는 문헌조사와 기초적인 지표조사에 그쳤다. 1980년대 중반 몽촌토성 발굴과 97년 풍납토성 본격 발굴을 계기로 본격적인 논의가 불붙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가능성이 높다고 지목된 곳은 하남 춘궁리로 조선시대 정약용이 백제 초기 도성으로 지목한 이래 늘 주목을 받았었다. 그러나 80년대말 발굴 결과, 백제 유물은 발견되지 않았다. 위례산성은 이름 덕분에 관심을 끌었지만 통일신라 성으로 확인됐다.
남은 것은 몽촌토성과 풍납토성.
▼ "풍납토성 축조 3세기경" 확인 ▼
몽촌토성은 1983∼88년 발굴 결과, 4세기 전후 지배층과 밀접한 백제 유물이 대량 출토됐고 연못 도로 등 왕궁에 준하는 구조가 드러나 유력한 백제 왕궁터로 떠올랐다.
그러나 풍납토성 발굴로 백제 초기 도읍지 논란은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1∼5세기에 이르는 백제 토기 조각과 집터 등이 발굴됐고 토성은 늦어도 3세기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확인됐다. 최근엔 중국 고위관료를 가리키는 ‘대부(大夫)’라는 용어가 새겨진 토기 조각과 대규모 공공 건물터도 발견됐다. 이 건물터는 왕궁터의 한 부분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현재로선 몽촌토성보다 풍납토성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성의 축조시기 및 출토유물 연대에 있어 풍납토성이 몽촌토성을 앞서고 있고 규모 역시 최대(폭 40m, 높이 9m 이상, 둘레 3.5㎞)라는 점, ‘대부’가 새겨진 토기조각 등이 출토된 점등이 이같은 가능성을 강하게 뒷받침 한다.
▼ 사실입증땐 백제사 다시 써야 ▼
하지만 결정적 유물이 출토되지 않아 단정할 수는 없다. 풍납토성을 발굴 중인 권오영 한신대교수는 “백제에서는 대부라는 관직명의 존재가 확인된 바 없어 면밀한 검토가 요구된다”고 신중론을 편다. 사학자 이도학씨는 “두 토성이 모두 백제의 왕궁이었을 가능성이 높지만 왕은 몽촌토성에 살았고 풍납토성은 일종의 별궁이었을 것”이라는 주장을 펴기도 한다.
어쨌든 풍납토성에 대한 발굴결과는 초기백제 한성시대(기원전 18년∼서기 475년) 연구의 핵심으로 떠올랐다. 풍납토성이 위례성임을 입증해 줄 수 있는 유물이 출토된다면 삼국사기에 근거해 ‘백제가 4세기 이후에야 고대국가로 자리잡았다’는 종전의 학설은 수정될 수밖에 없다. 풍납토성의 규모로 보아 백제가 3세기에 이미 고대국가로서의 면모를 갖췄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학계의 눈이 풍납토성에 쏠리고 최근 문화재위원회가 토성 내부에 아파트를 짓겠다는 주택조합의 허가신청에 제동을 건 것도 이런 까닭에서다.
<이광표기자> kpl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