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일의 책]'아름다운 것은 무엇을 남길까'

  • 입력 2000년 2월 17일 17시 09분


▼'아름다운 것은 무엇을 남길까' 박완서지음/세계사 펴냄/269쪽 8000원▼

박완서에게는 거짓이 없다. 여류‘소설가’이라기보다는, 연륜을 고매한 인품으로 포장한다기보다는, 시기하고 샘내고 화내고 침묵하다가도 할 말은 다하는 입담 센 여느 할머니중 하나일 것 같다.

이 책에서 그녀는 모든 것을 담았다. 거창하게 박완서 문학 30주년을 기념하는 결실이라고 하지만 그런 수사가 필요하지 않다. 살 날보다 산 날이 훨씬 더 많은 서글픈 나이에 어릴 적을 공상하며 묶은 글들의 모음집. 오히려 이것 자체로 의미를 갖는다. 여기 모인 글에는 박완서를 연상시키는 풍경들이 있기 때문에.

“개나리 덩굴과 이끼 낀 화강암 댓돌 밑에서 자생하던 우리집에만 있는 이름 모를 풀들과, 아이들이 어렸을 적부터 키가 자라는 대로 그 성장을 일목요연한 눈금으로 새겨놓은 기둥과, 육중하고 우아한 대들보와, 삐걱대는 마루와, 시커멓게 찌든 예전 장지문”(본문 ‘우리들의 실향’ 중)을 그리워하며 장독 옆에 쪼그리고 앉아있을 그녀의 젊은 날.

남들은 설맞이를 위해 분주하고 “보통 때보다 몇 배나 더 살림재미가 날 시기에 살림의 번거로움을 떠나기 위해” 지도를 펴들고 ‘화려한 외출’을 시도하는 ‘밥데기(가정주부)’의 일탈. 여행 최초의 목적지로 부여를 택하며, 같은 고도(古都)이면서도 경주처럼 화려하게 단장하고 사람들을 불러들일 줄 모르는 게 마음에 들었다(본문 ‘한겨울의 출분(出奔)’ 중)는 그녀의 삐딱함 혹은 솔직함.

“텔레비전이 평행선식 질의응답, 오로지 웃기기 위한 말장난, 외마디 아우성, 뭐 묻은 개가 뭐 묻은 개 나무라는 식의 설교 등의 말하는 법을 가르치는 것”이 무섭다(본문 ‘말장난’ 중)는 매서운 판단력.

박완서의 글을 대할 때는 머리굴릴 필요가 없다. “나는 한겨울에 돌아오기 위해 한겨울에 떠났다”는 것처럼 자신의 삶을 반추하는 가운데 삶의 앞을 내다보는 사람이기에 그녀에게 솔직하기만 하면 된다.

신은<동아닷컴 기자>nsilve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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