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 주최 43기 국수전에서 조훈현 9단을 꺾고 첫 여성 국수에 오른 루이나이웨이(芮乃偉·37) 9단은 ‘여제(女帝) 등극 이튿날인 22일 어디에 있었을까? 서울 성동구 홍익동 한국기원에서 걸어서 5분 거리에 있는 숙소인 오피스텔에는 없었다. 또 오전 9시부터 하루 12시간씩 바둑 돌과 씨름하던 기사연구실에서도 여성 국수의 얼굴을 찾아볼 수 없었다.
루이 9단은 경기 성남시 분당에 있는 케이블TV인 바둑TV의 검토실에서 남편 장주주(江鑄久·38)9단의 대국을 지켜보고 있었다. 자신의 바둑을 ‘외조’하느라 눈코 뜰 새없이 바빴던 남편이 맥심배 준결승에서 격전을 치르고 있기 때문이다. 한때 중일(中日)슈퍼대항전에서 발군의 실력을 발휘하며 중국 바둑계의 유망주로 부각되기도 했던 장 9단의 지난해 성적도 그리 나쁜 편은 아니다. 15승10패, 승률 60%. 하지만 여류국수에 이어 제1회 흥창배 세계여자바둑선수권대회 우승, 국수전 우승 등으로 이어지는 루이의 성적이 워낙 화려했다.
루이 9단은 “자신(장 9단)의 성적에 관계없이 내가 큰 승부에서 이기면 중국 상하이(上海의) 어머니에게 승전보를 알리던 남편이 너무 고맙다”면서 “남편이 없는 인생은 글쎄…”라고 말꼬리를 흐린다. 요컨대 ‘사랑없는 바둑도, 바둑없는 사랑도 싫다’는 것이다.
어쩌면 남편이 한수 한수 돌을 놓을 때마다 루이 9단의 가슴에는 사랑이 없는 바둑, 바둑이 없는 사랑으로 보냈던 10년 세월이 파도처럼 물결치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바둑과 사랑. 루이에게 그 어느 한쪽이 빠진다는 것은 ‘반쪽’ 짜리 인생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세계 바둑계에 잘 알려진 대로 이들 부부는 1990년 당시 연인이었던 장 9단이 텐안(天安)문사태에서 시위 등의 이유로 중국을 떠난 뒤 92년 잉창치(應昌期)배 때 일본 도쿄에서 만나 냉수 한 사발로 미뤘던 결혼식을 올렸다. 일본에서 프로기사로 활동을 희망했지만 일본 기원의 반응은 냉담했다. 이미 세계 여류바둑계의 최강자였던 루이가 한수 아래의 일본 여성 바둑계를 평정할 것을 우려했던 것. 그래서 건너간 미국은 자유로웠지만 바둑의 불모지나 다름없어 프로기사로서의 생활 자체가 불가능했다.
22일 오전 국수전 우승 인사차 한국기원을 방문한 루이 부부는 “한국에서 바둑을 둔다는 것 자체가 기쁘다”면서 “이창호 조훈현 9단을 이기고 국수전에서 우승했다는 게 믿어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중국 상하이에서 태어난 루이는 아마추어 초단 수준인 아버지 루이쥔루(芮鈞如)의 영향으로 10세에 바둑세계에 첫발을 들여 놓았다. 루이 9단은 “바둑 밖에는 아무 것도 모른다”는 장 9단의 평처럼 지독하게 바둑에 매달려 80년 중국국가대표로 발탁되면서 두각을 나타냈다. 86년부터 89년까지 중국 전국대회 여자부 개인전을 4연패했고 88년에는 여성 최초로 세계 최초로 9단위에 올랐다.
루이는 남편과 함께 빠르면 25일 상하이에 있는 친정을 찾아 다음달 10일까지 중국에 머무를 계획이다. 루이국수는 이따금 상하이를 방문했었다. 그러나 여성 기사 최초로 일반 기전에서 타이틀을 차지한 뒤 찾는 귀향길이라 루이 국수의 가슴은 설레고 있다.
<김갑식기자> gs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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