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봉건사회가 무너져가던 19세기중엽, 김삿갓은 세상에 대해 할 말이 많았다. 40여년간 팔도를 방랑하며 당시 양반귀족들의 부패상과 죄악상, 비인도성을 폭로 풍자했다.
신분에 따른 빈부차이가 극심하던 사회을 향해 "세상 사람이 부자만 따라가고 가난한 사람을 좇으려 안하니 (…) 그러나 하늘 자연만은 빈부의 차이를 둠이 없이 이 오막살이 띠집에도 따뜻한 봄빛을 골고루 보냈" ('가난한 살림' 중)다며 삿대질을 해댔으며 "소리개를 보아도 무서워할 놈이 어른이 되었다고 큰관을 버티고 다니는 꼴이 꼭 누가 뱉어놓은 한 알의 대추씨"('양반의 아들을 조롱함' 중)라고 허울뿐인 양반을 비아냥대기도 했다.
사회 비판뿐 아니라 '창문'이란 시에서는 "열 십자(十)가 서로 이었고 입 구자(口)로 째였는데…"라고 재치있게 표현하는 등 破字를 이용해 세상을 마구 풍자했다. "다리 아래에 동서남북 길이 갈리고 지팡이 머리에 일만 이천봉이 솟았다…"며 금강산을 예찬하기도 했다.
삿갓시인은 연애시도 많이 남겼는데 "이별한 뒤 잊기 어려워 옛사랑을 찾아오니 그는 이미 죽어 백골이 되고 내 머리 또한 희어 백발이 되다 (…) 그래 내 추억의 땅에 와 고운 얼굴 못보고 수레를 멈춘 뒤에 들꽃을 사랑하노라"('가을 바람에 미인을 찾아왔다 만나지 못하다' 중)며 풋풋한 첫사랑을 되뇌이는 모습도 보여주었다.
그의 시에 울고 웃으며 그 웃음 속에서 의미를 발견하고 그 예리함과 재치에 그저 한번 더 웃어주면 된다.
엮은이 이응수씨는 일제 강점 하에서 전국 각지를 답사하며 김삿갓의 시를 수집, 1939년 '김립시집'을 펴냈다.
전국을 돌며 세상에 대해 거침없는 시들을 토해냈던 김삿갓.
이제 그의 방랑생활에만 초점이 맞춰져 빛을 보지 못했던 작품들을 제대로 이해하고 그를 진정한 시문학자로 바라볼 때가 아닐까.
이희정<동아닷컴 기자>huib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