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태인 여성으로 나치와 스탈린의 전체주의를 목격했고, 인공위성을 쏘아 올려 지구 밖으로 나가려는 인간들을 지켜보기도 했던 한나 아렌트(1906∼75). 그는 인간이 인간에게 행하는 잔인함과 지구를 탈출하고자 하는 갈망을 바라보며 ‘악’의 실체를 파헤치고 이 사회 속에서 그 악으로부터 해방된 ‘인간적인 삶의 질서’를 찾고자 했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와 하이데거를 넘어서 새롭게 제기한 ‘행위’ 개념을 통해 정치를 ‘사익(私益)들의 시녀’라고 폄하해 온 자유주의 전통을 거부하고, 정치를 고결한 위치로 복권시켰다. 그는 ‘정치행위’ 개념을 통해 시민의 지속적 직접적 개입이란 맥락에서 정치를 재구성함으로써 인간적인 삶을 실현하고자 했다.
미국 하버드대 정치학교수인 저자는 이 책(원제:Arendt and Heidegger-The Fate of the Political)에서 아렌트의 ‘정치행위’ 개념이 형성 발전돼가는 과정을 치밀하게 추적한다. 특히 정치행위 이론의 뿌리가 되는 아리스토텔레스와 함께, 아렌트가 존경하고 사모했던 스승 하이데거의 영향과 그를 극복하는 과정에 주목한다.
아렌트는 행위가 어떤 것의 도구도 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행위는 실존을 위한 자기 충족적인 것이지 도구적인 것이 아니다. 따라서 자유주의자들이 정치의 중심 요소로 보는 법과 제도는 아렌트의 관점에서는 단지 행위를 위한 틀을 제공할 뿐이다. 오히려 토론 심의 등 결정과정에서의 참여활동이 정치무대의 중심을 차지한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프락시스(praxis·행위) 개념에 대한 재해석을 통해 참여민주주의자들이 강도 높은 민주주의 정치 형태를 만들어내는 데 기여한 것이다.
한편 하이데거는 아렌트의 이론에 자유, 해체, 근대적 소외에 대한 진단 등의 토대를 제공했다. 아렌트는 이런 토대 위에서, 점차 초월적이고 종교적인 불멸성을 추구해간 하이데거의 철학에서 정치적 사유를 복원해낸다. 그래서 저자는 “아렌트는 하이데거의 철학적 정치학 비판에 가장 설득력 있는 연장을 제공한다”고 말한다.
저자는 “초정치적이고 궁국적인 것들에 호소하지 않고 행위와 정치를 사유하기 위해서는 ‘철학자’ 하이데거가 아니라 ‘정치적 사유가’ 아렌트에게 눈을 돌려야 한다”고 강조한다. 서유경 옮김. 563쪽. 1만5000원.
<김형찬기자>khc@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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