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소비자 파워]소비자운동의 꽃 NGO

  • 입력 2000년 2월 28일 23시 10분


지난해 말 영국 런던에서 열린 자동차 전시회장. 200여평에 달하는 드넓은 전시장에 세계적으로 유명한 39개사의 자동차 70여종이 휘황찬란한 조명 속에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이 모터쇼는 영국 자동차협회가 최근 부진을 면치 못하고 있는 자동차 판매 신장을 위해 기획한 야심작.

그런데 기이하게도 전시회장의 중앙 벽면에는 ‘영국은 자동차를 바가지 씌워 팔고 있다(The Great British Car Rip-off)’고 쓰인 가로 5m, 세로 2m의 대형 현수막이 걸려 관람객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한마디로 행사 취지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포스터가 행사장의 안방을 차지하고 있었던 것. 현수막 아래엔 ‘영국에선 차를 사지 말자’는 취지의 선전코너까지 설치돼 있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이는 바로 소비자와 소비자단체의 힘. 이 현수막과 코너는 영국에서 가장 큰 소비자단체인 소비자협회(CA·Consumers Association)가 설치한 것.

그동안 영국에서 팔리는 차가 서유럽 다른 나라보다 터무니없이 비싼 데 대해 줄기차게 항의했지만 자동차회사나 딜러들이 별 반응을 보이지 않자 실력행사에 나선 것이다.

영국 소비자협회에 따르면 영국에서 팔리는 차는 영국산이건 외국산이건 서유럽 다른 나라에 비해 15∼60% 가량 비싸다. 덴마크에서 9810파운드(약 1766만원)에 살 수 있는 볼보S70이 영국에서는 66% 비싼 1만6275파운드(약 2930만원)라니 사정을 알 만하다.

영국차가 비싼 데 대해 딜러들은 그동안 환율이나 세금, 물류비용 등을 내세웠다. 그러나 유럽연합(EU)의 거대한 단일시장이 탄생한 지금 이런 명분들은 설득력을 잃었다. 따라서 소비자단체가 ‘불매운동’을 벌이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

시민들의 호응도 대단했다. 관련법률을 개정해 더 이상 ‘바가지 씌우기’를 못하도록 하자는 취지의 ‘의원에게 보내는 편지’ 코너엔 서명하려는 시민들의 발길이 하루 종일 줄을 이었다.

이날 서명에 참여한 피터 앤더슨(28)은 “앞으로 차를 외국에 가서 사야겠다”며 “소비자단체와 소비자가 함께 행동에 나선 만큼 영국 자동차 딜러들은 1, 2년 안에 서유럽과 비슷한 가격으로 차값을 내리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처럼 소비자의 권리는 저절로 주어지는 게 아니다. 기업 또는 정부를 상대로 한 끈질긴 투쟁 끝에 얻어지는 것이다.

영국 소비자협회가 최근 제기하고 있는 문제는 자동차가격 인하운동 외에도 정보공개법 제정과 전기 가스료 인하 등 여러가지다.

영국 소비자협회는 98년에도 유전자조작식품(GM foods)의 안전성에 집중적으로 문제를 제기해 식품사들이 유전자 조작식품에 모두 ‘GM Foods’라는 딱지를 붙이도록 하는 소득을 올렸다. 현재는 유명 유통업체 테스코(TESCO) 등 대부분의 유통점이 이를 팔지 않기로 해 유전자 조작식품은 매장에서 아예 찾아보기 힘든 실정.

이처럼 소비자를 위해 일하는 단체가 소비자협회만은 아니다. 영국의 시민단체 가운데 소비자관련 단체만 해도 270여개에 이른다. CA의 경우 소속직원만 400여명. 웬만한 기업규모와 맞먹는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영국정부나 기업들도 소비자단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을 수 없다. 소비자단체의 목소리는 곧바로 판매에 영향을 미치는데다 정부 역시 유권자에게 막대한 영향력을 지닌 소비자단체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영국 정부가 지난해 정보공개법 입법을 주저주저하다 결국 제정키로 한 것도 이런 소비자단체와 소비자들의 힘 때문이다.

현재 소비자의 권리가 가장 잘 보장되는 나라로 알려진 미국 역시 마찬가지다.

소비자의 선택권을 넓혀주기 위해 정보제공에 주력하는 등 소극적인 태도로 일관하던 미국의 소비자운동이 소비자를 우롱하는 기업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고 불매운동을 벌이는 등 적극적 운동으로 발전한 것은 ‘소비자운동의 산 증인’ 랠프 네이더(65) 덕분.

그는 폭넓은 조사와 분석을 통해 자동차 안전과 환경오염, 정보공개 등 다양한 분야에서 소비자 권리가 보장되도록 했으며 ‘집단구매 시스템’을 만들어 경유가격을 내리도록 하는 등 기업의 횡포에 맞섰다.

미국의 소비자단체 역시 엄청나게 많다. 전국적인 조직체를 형성한 단체만도 소비자연맹(CU·Consumers Union) 등 무려 260여개. 미국소비자단체연합(CFA·Consumers Federation of America)은 바로 이들의 연합체. CFA는 매년 독점 과점 반독점 사례를 조사해 수백쪽에 달하는 보고서를 펴낸다. 지난해 미국의 최대업체인 마이크로소프트사가 법정에서 반독점법에 걸려 패소하도록 한 곳도 바로 이 CFA다.

영국 소비자협회 대표 쉴라 메케니(Sheila Mckechnie)는 “영국 미국 등의 소비자 권리가 다른 나라에 비해 상대적으로 잘 보호되는 것은 60년 이상 기업과 정부를 상대로 소비자단체와 소비자들이 싸운 결과”라며 “소비자의 권리는 결코 기업이나 정부가 그냥 주는 선물이 아니다”고 말했다.

<런던·워싱턴〓하종대·이병기기자> orionha@donga.com

▼소비자단체 운영비 마련 '各國各色'▼

지난해 말 영국 배스에서 열린 국제소비자기구(CI·Consumers International) 대회장.

순탄하게 진행되던 대회장에 갑자기 긴장감이 감돌았다. CI의 주요 회원국인 독일측이 앞으로 회비를 못내겠다고 선언하고 나선 것. 정부 보조금으로 운영비를 충당하는 독일 소비자단체로서는 “왜 혈세를 해외단체의 회비로 내느냐”는 자국 정부의 불만을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소비자운동이 정부와 기업의 입김에 얽매이지 않기 위해서는 독자적으로 재원을 확보하는 게 필수. 그러나 그 재원마련 방식은 나라마다 크게 다르다.

영국과 미국 호주 등 영미계통 나라의 소비자단체들은 소비자 잡지나 단행본을 발행해 그 수익으로 운영비를 충당한다. 미국의 최대 소비자단체 컨슈머 유니언이 발행하는 ‘컨슈머 리포트’지는 매달 470여만부가 팔린다. 영국의 소비자협회(CA)가 발행하는 월간지 ‘Which?’ 구독자도 50만명을 넘는다. CA가 매년 발행하는 단행본 책자만도 70여종으로 50만부 이상씩 팔린다. 책만 팔아도 재원을 마련할 수 있는 것이다. 이들 단체가 기업의 영향을 받지 않기 위해 자체 제작하는 잡지에 기업광고를 ‘절대사절’하는 것도 바로 이런 ‘여유’에서다.

이에 반해 독일 프랑스 등 유럽대륙의 나라들은 정부로부터 예산지원을 받는다. 그러나 조직이나 역할은 철저히 독립적이다. 프랑스의 최대 소비자단체 소비자연맹(UFC)의 경우 많지는 않지만 연간 예산 9000만프랑 가운데 200만 프랑이 정부지원금.

한편 아시아와 중남미, 아프리카의 소비자 단체는 대부분 후원금에 의존하고 있으나 수입이 턱없이 모자라 활동이 미미한 편이다.

<바쓰〓하종대기자> orionha@donga.com

▼한국은…/소비자운동 '걸음마'▼

우리나라의 소비자운동은 아직 ‘걸음마 단계’다. 꼭 30년 전인 70년 한국소비자연맹이 설립되면서 소비자운동이 태동됐지만 조직이나 인원, 예산면에서 볼 때 영국 미국 등 선진국과는 천양지차다.

2월말 현재 소비자보호단체 협의회에 가입된 소비자관련 단체는 모두 10개.

이 가운데 소비자보호만을 전담하는 단체는 소비자 문제를 연구하는 시민의 모임(소시모)과 한국소비자연맹, 녹색소비자연대와 소비자교육원 등 5개다. YMCA, YWCA, 주부교실이나 주부클럽, 한국여성단체협의회 등도 소비자운동을 벌이지만 전체 활동의 일부일 뿐이다.

조직의 인원이나 예산은 더욱 미미하다. 소비자단체 가운데 가장 활발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소시모의 경우 상근직원은 32명. 연간 예산이라야 고작 4억원 가량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소비자단체의 활동이 선진국처럼 소비자 문제를 해결한다기보다 문제를 제기하는 수준이다.

이에 반해 외국의 소비자단체는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캠페인을 벌인다.

비록 기업이 소비자단체의 주장을 수용하더라도 정부에 법적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도록 해 재발을 방지한다.

물론 예외가 없는 것은 아니다. 소시모의 경우 89년 백화점의 사기세일을 문제삼아 4년7개월 간의 법정공방 끝에 승소하는 집념을 과시하기도 했다.

소비자단체가 소비자가 필요로 하는 유익한 정보를 생산해내지 못하는 것도 큰 문제점. 정보제공용 잡지나 책을 제작 판매해 재원을 충당하는 선진국과 달리 얼마 안되는 회비 등에 의존하다 보니 항상 쪼들리고 심지어 운동 자체가 위축되기도 한다.

<하종대기자> orionha@donga.com

▼랠프 네이더는 누구▼

하버드대 로스쿨을 나온 랠프 네이더(65)는 당초 평범한 변호사였다. 그가 일약 ‘미국 소비자운동의 기수’로 발돋움하게 된 것은 65년 제너럴모터스(GM)의 신차 ‘코르베(Corvair)’의 결함을 고발하면서부터. 그는 자신의 저서 ‘어떤 속도에도 안전하지 않다’를 통해자동차 안전문제를 심도있게 분석, 고발했고 GM은 그의 약점을 잡기 위해 사립탐정까지 고용해 괴롭혔으나 끝내 굽히지 않았다.

결국 이 사건은 GM의 시인과 사과로 끝맺었고 네이더는 그 뒤 식품의약품의 안전과 환경오염은 물론 정부의 정보공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소비자권리를 위해 싸웠다. 그는 ‘시민의회감시단’ 등 40여개 소비자단체를 조직하는 데도 주도적 역할을 했다.

한편 그는 최근 정치개혁과 소비자권익 보호를 위해 11월 실시되는 대통령선거에 출마하겠다고 선언, 눈길을 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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