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사의 여신 자청비, 서천꽃밭 사라대왕, 저승길 길라잡이 강림, 설문대 할망…. 제주도의 토속신들이 사람의 옷을 입고 소설 속으로 나들이를 했다. 작가 이명인의 장편소설 ‘집으로 가는 길’(문이당).
이복 남매의 운명적인 사랑을 소재로, 2대에 걸린 한의 맺힘과 풀림을 통해 사람 사이의 인연이 가진 주술적 힘을 드러낸다.
홍로와 청비는 어린시절 구덕혼사 (어른들 끼리 언약한 혼사)로 맺어진 사이. 홍로는 지긋지긋한 가난을 피해 죽은 아버지의 시신을 남긴 채 육지로 야반도주하고, 홀로 남겨진 청비는 혼자 홍로의 딸인 채운을 낳는다.
오랜 세월이 지난 뒤 홍로의 아들 강림이 우연히 제주에 들리고, 채운이 그린 그림에 강렬한 인상을 받은 끝에 자신도 모르는 이끌림에 빠져들게 된다.
과도한 우연이 작품의 결함으로 지적될 수도 있을 듯. 그러나 설화의 현대적 변용을 복선으로 깔고 있는 위에서 어느 정도의 우연은 오히려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다.
“주인공들에 신격(神格)을, 또는 신들에게 사람의 얼굴을 입힌 것은 예전 우리 조상들과 편하게 공존해온 신들을 부활시켜 우리 곁에 함께 살게끔 하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작가는 말한다. 작가는 97년 장편 ‘사랑에 대한 세가지 생각’으로 제1회 탐라문학상을 받았고 지난해 장편 ‘아버지의 우산’을 출간했다.
<유윤종기자> gustav@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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