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종합상사 등 해외파견 사원이 많은 기업에는 해외주재원으로부터 이런 문의전화가 자주 걸려온다. 뉴스만 접해서는 이해하기 힘든 일이 너무 많다는 것.
▼온통 코스닥-벤처 얘기▼
레바논 베이루트무역관에서 3년 근무한 뒤 두 달 전 귀국한 대한무역진흥공사 김규식 과장(41)의 가족은 요즘 한국생활에 적응하느라 힘든 하루를 보낸다.
중학생(14)과 초등학생(12)인 두 아들은 “친구들과 말이 잘 통하지 않는다”며 자주 울먹인다. 친구들은 컴퓨터게임이나 채팅, 인터넷사이트에 대해 떠드는데 대화에 끼어들 수 없어 ‘인터넷 왕따’가 됐다는 것.
곤혹스럽기는 김과장도 마찬가지. ‘디지털 혁명이 진행중이다’는 말은 들었지만 회사는 물론 사회 전체가 이처럼 급격하게 변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오랜만에 고교동창들을 만나봐도 친구들은 온통 ‘코스닥’과 ‘벤처’ 이야기만 한다. 친구들의 대화를 듣다 보면 자신만 해외에 체류하느라 재테크에 실패한 것 같아 울적해진다.
▼"환란 엊그제 같은데…"▼
김과장은 우선 두 아이를 컴퓨터학원에 등록시켰다. 부인 역시 4월부터 서울 서초동문화센터에서 인터넷을 배울 계획.
터키 이스탄불에 3년째 근무중인 S상사의 박모과장(36)이 한국관련 뉴스를 접할 때마다 느끼는 심사도 비슷하다.
‘금모으기 운동’이나 ‘노숙자’ 뉴스를 들은 게 엊그제 같은데 ‘코스닥 투자로 수십억원을 벌었다’거나 ‘벤처기업 하나를 팔면 대기업 몇 개를 살 수 있다’는 등의 소식을 듣다 보면 몇 년간 한국과 소식을 끊은 채 살아온 것 같다는 착각이 들곤 한다.
그는 이달 들어 틈만 나면 친구나 대학동창에게 전화를 건다. 신문이나 방송만으로는 이해가 잘 되지 않아 한국의 상황을 육성으로 생생하게 듣고 싶기 때문. 무역실무를 익혀 언젠가는 창업을 하려던 박과장은 친구들로부터 벤처창업 붐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중요한 기회를 해외근무 때문에 놓쳐버리는 것이 아닌지’ 고민 중이다. 그는 최근 회사에 본부로 발령을 내달라고 거듭 요청했다.
지난달 파리에서 귀국한 한 종합상사의 박모부장(44).
▼"나만 뒤졌나" 초조▼
고참부장들이 국제통화기금(IMF)관리체제 때 구조조정으로 회사를 떠난 것은 알고 있었지만 대리나 과장급 10여명이 벤처로 이동한 사실을 알고는 깜짝 놀랐다. 더구나 탄탄한 대기업을 떠나 장래가 불투명한 중소기업으로 옮긴 동료를 다른 사원들이 부러워하는 것을 보고 세상의 변화를 실감했다.
소외감도 밀려온다. 회사의 인터넷관련 전략을 짜면서 담당이사가 박부장을 제쳐둔 채 30대 초반의 대리나 젊은 과장들과 일하는 모습을 보면 복잡한 감정에 사로잡힌다. 몇 년 전만 해도 종합상사의 부장은 모든 프로젝트의 책임자였는데 이제는 일의 중심이 30대로 내려가 고참과장이나 부장은 허세로 전락한 느낌.
가까운 입사 동기는 “동기들끼리 경쟁하는 시대는 가고 이제는 후배들하고 경쟁해야 한다”면서 “경험만 앞세우지 말고 새로운 게임의 룰에 빨리 적응하라”고 충고했다.
정보화가 우리보다 앞선 선진국에서 근무하는 주재원들도 불안하기는 마찬가지.
삼성물산 독일 본지점장 김청환부장은 “독일 역시 디지털 및 벤처 열풍이 불기는 하지만 우리처럼 온 나라가 시끄럽지는 않다”며 “주재원이나 교포들은 최근 한국에서 온 사람을 붙잡고 벤처나 코스닥에 대해 묻곤 한다”고 전했다.
<이병기기자>ey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