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의 어느 순간까지 강득희씨(51·이대 사회학 강사)에게 엄마는 세상에서 지치고 힘들 때 돌아와 아무렇게나 분풀이하며 하소연할 수 있는 ‘바다’였다. 그러면서도 강씨는 여느 딸처럼 ‘엄마니까 이렇게 해도 괜찮겠지…’하며 손톱만큼도 미안해하지 않았다.
강씨의 어머니 최정예씨(81)가 정신을 놓던 날, 강씨는 “내게 왜 이런 불행이!”하며 울지 않았다. 오히려 “이제까지 엄마에게서 받아만 왔던 사랑을 엄마에게 돌려줘야할 생의 전환점에 섰다”고 스스로에게 담담히 말했다.
▽갈등의 시작-1983년〓강씨는 딸만 셋인 집안의 둘째였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었지만 강씨가 대학 1학년 때 사업에 실패한 아버지가 세상을 뜨고 엄마가 하던 일마저 잘되지 않자 가세는 급격히 기울었다.
강씨의 딸 이아주씨(25)는 “할머니는 치매에 걸리기 전 ‘네 엄마에겐 대학시절 청바지 두 벌밖에 사주지 못했다’며 마음의 빚을 갖고 있었다”고 말한다.
강씨가 뒤늦게 못다한 공부에 뛰어들었던 건 79년. 육아와 가사로 쩔쩔매는 딸을 보다 못해 4년뒤 최할머니가 사위집에 들어올 때도 ‘딸네 들어가 사는 게 아닌데’라며 무척이나 망설였다.
“엄마에게 재력이라도 있었으면 딸에게 얹혀산다는 자격지심을 갖지는 않았을거다. 워낙 집안이 기운 뒤라….”(강씨)
▽손녀의 눈으로 보기-끝없는 오해(1983∼96년)〓그러나 함께 지내는 10여년은 ‘엄마’이기 때문에 함부로 하는 딸과 그 ‘함부로’가 서러운 엄마가 갈등을 키우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할머니가 집안 일을 조금만 잘못해 놓으셔도 엄마는 막 뭐라고 했어요. 그럼 할머니는 서운해하시고. 저도 엄마를 원망한 적이 많아요. 시부모한테는 저러지 못하시겠지 하면서.”(아주씨)
할머니와 엄마의 ‘모녀전쟁’을 손녀인 아주씨는 어떻게 바라봤을까.
엄마는 왜 할머니가 도와주는 걸 당연하게 여길까. 사소한 일에도 “엄마, 식탁에 수저도 제 짝을 맞춰 놓지 않으시면 어떡해요?”라거나 “엄마, 냉장고 속 반찬통은 왜 꼭 다른 것으로 바꿔 덮으시는 거예요?”라며 핀잔을 줬다. 묵묵히 듣는 할머니였지만 어느 땐 “나, 가겠다”며 서러워했다.
한번은 할머니가 무슨 고까운 일이 있었는지 동네 가게에서 과일을 사다 방에서 혼자 드셨다. 너무 속상해서 “집에 있는 거 드시지 왜 그러세요?” 그랬더니 “내 건 내 용돈으로 사 먹을 거다”하셨다. 끝이 어딘지 모를 오해의 연속이었다.
▽불행은 창문 밖에 있었다(1996년11월)〓외모를 중시하던 최할머니는 퍼머 염색 등 머리 손질을 일정한 간격으로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강씨는 미장원 직원에게서 뜻밖의 말을 들었다. 할머니가 퍼머한 지 며칠 안돼 또 퍼머를 하러 오신다는 것.
강씨는 그 때까지도 치매라곤 상상도 못했다. 너무나 똑똑한 엄마가 치매에 걸릴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
11월의 어느날, 강씨의 친구 부부가 방문해 하루밤 묵었다. 손님이 오전에 화장실을 사용하는 시간이 길어지자 최할머니는 대변을 참지 못했다. 병원에선 치매로 진단했고 최할머니는 20여일 입원 치료를 받았다.
그로부터 3년여. 최할머니의 매일의 식사, 하루 4∼6번의 소변, 매주 한 두번의 대변을 강씨나 아주씨가 직접 챙긴다. 아주씨는 “엄마가 전혀 다른 사람이 됐다”며 “할머니가 아프신 건 마음이 아프지만 늘 행복해하셔서 이전보다 더 화목하다”고 했다.
▽강씨의 이야기-화해와 평온(현재)〓“엄마에 대한 사랑은 이전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전엔 엄마도 내 사랑이 필요하다는 걸 헤아리지 못했을 뿐….”
며칠 전 한 손님이 “할머니 따님 손녀딸이 어쩜 그렇게 닮았어요?” 하니까 엄마는 “누가 젤 이뻐?”하신다. 맞아. 엄마는 그렇게 이쁘게 단장하길 좋아했었지.
한동안 잊고 지냈던 엄마의 좋은 점들을 엄마가 쓰러진 다음에야 깨닫게 됐다. TV를 보던 엄마가 아주에게 “김치 가져와” 한다. “왜요?” 하니까 “쟤가 김치 먹고 싶어해”라며 TV등장인물을 가리킨다. 엄만 예전에도 남들에게 베풀기를 좋아하셨다.
물론 힘든 날도 있다. 강의 때문에 집을 나서려는데 엄마가 기저귀를 풀고 오물을 옷에 묻힐 때. 그래도 어쩔 줄 몰라하는 내가 안됐는지 엄마는 “그냥 두고 가, 그냥 두고 가” 그런다.
난 엄마의 기저귀를 갈아드리면서 “엄마, 예전엔 아들이 없어서 그렇게 불행해했지만 지금은 딸이 좋지?” 묻곤 한다. 내 말을 알아들으셨을까. 강의준비를 하다보면 어느새 옆에선 따뜻한 기운이 느껴진다. 엄마는 아기처럼 살금살금 기어서 내 옆에 온거다. 물끄러미 쳐다보다 내 어깨도 쓰다듬는다….
중요한 건 엄마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거다. 살아가는 모습은 다양하지만 살아있다는 그 자체로서 의미있기 때문이다.
<이나연기자> larosa@donga.com
▼독자의 메일/"암투병 엄마… 오래만 살아주세요"▼
▽엄마는 1945년 해방둥이다. 오빠와 난 어릴 때부터 보통 아줌마들이 그렇듯 여기 아프다, 저기 아프다 하는 엄마의 말을 들으며 컸다. 그러나 또한 보통 아줌마들이 그렇듯 엄마는 엄청 씩씩하고 목청크고 괄괄해서 건강하게만 생각됐고 나중엔 아프다는 소리에 신경도 쓰지 않게 됐다.
그런데 지난해 엄마는 암선고를 받았다. 양쪽 유방을 모두 잘라내는 견디기 힘든 시련이었다. “엄마”를 부르며 울던 엄마는 어느새 늙고 힘없는 할머니였다. 8시간이 넘는 수술, 한달이 넘는 입원치료, 퇴원 후에도 항암제와 방사선 치료로 엄마는 무척 힘들어했다. 많이 울고 기운없어하는 엄마를 보며 나도 참 많이 울었다. 왜, 조금이라도 더 배운 내가 좀더 일찍 신경써서 엄마 병을 발견하지 못했을까. 자책에 엄마 얼굴을 바라보기가 힘들었다.
이제 항암치료를 끝냈다. 잔병치레 하더라도 엄마가 주어졌던 삶을 다 사시고 늙어가길 바란다. 아주 오랫동안 엄마의 늙어 주름져가는 얼굴을 보고 싶다. 앞으로도 아주 오랫동안….(최정진)
▽호인인 아버지 때문에 엄마는 고생을 많이 하셨다. 어려서 난 “엄마는 왜 이렇게 살아”하며 삶을 바꾸지 못하는 엄마를 안타까와했다. 그럴 때면 엄마는 “너도 자식 낳고 살아봐, 어떤 게 우선인지…”라고 말했다. 별 탈없이 커가는 남동생과 내가 엄마의 목표였고 행복이었다.
늙어서 엄마의 말동무라도 해주길 바랬던 무정한 아버지도 7년 전 가셨다. 젊은 시절 즐겁게 살라고 아들을 분가시킨 뒤 ·혼자 조석 끓여드시는 어머니를 생각하면 여자의 삶은 왜 이리도 뒷전이어야 하는가 상념에 잠기게 된다.
그 삶을 너무 잘 아는 어머니인지라 내가 그리도 애틋했을 거다. 나 또한 벌써부터 딸아이를 보면 아무리 시대가 바뀌어도 여자의 삶은 쉽지 않을 듯해 가슴이 뭉클해진다.(김성희)
※다음은 ‘엄마와 딸’시리즈의 마지막편인 ‘이혼과 재혼, 그리고 새로운 가족’입니다. 이혼이나 재혼으로 시작한 또하나의 삶, 새롭게 만난 가족들의 이야기를 E메일(kjk9@donga.com)로 보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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