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이문열 새장편 '아가(雅歌)'/백치여인 삶 그려

  • 입력 2000년 3월 20일 19시 32분


작가 이문열씨가 새 장편소설 ‘아가(雅歌)’(민음사 펴냄)를 내놨다.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라는 부제가 붙어있는 이 작품은 면(面)단위 지역사회를 배경으로 정신장애 여성 ‘당편이’의 굴곡 많은 일생을 그리고 있다. 작가가 2년만에 내놓은 장편소설로, 이문열 특유의 주제에 대한 심층적 천착과 사색이 곳곳에 배어 있다. 작가를 서울 인사동 한식집에서 만났다.

-1998년 ‘변경’을 완간한 뒤 2년이 채 되기 전에 내놓는 장편입니다.

“‘변경’에 앞서 97년에는 ‘선택’을 냈는데, 실은 1991년 ‘시인’ 이후에 처음 쓰는 작품같은 생각이 듭니다. ‘변경’은 30대 후반에 구상해 쭉 써온 작품이고, ‘선택’은 전기성(傳記性)이 강해 새 작품을 낸다는 느낌이 적었던 때문인가 봅니다. 애초 중편으로 계획했는데, 일이 커졌어요.”

-주인공을 정신장애인으로 설정한 데 눈길이 갑니다. 장애인 소설이라기보다는 그를 통해 지역공동체의 의미를 질문한 작품으로 보이는데요.

▼예전엔 장애인도 마을구성원▼

“마을 공동체가 과거에는 여러 겹으로 돼 있었어요. 신분적 소외자나 병자, 걸인들이 바깥쪽 원을 그리고, 그보다 바깥 쪽은 심신 상실자와 장애인들이 마을 사람들의 부양을 받으며 둘러싸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요즘은 그런 사람들이 수용시설로 다 들어갔어요. 똑똑한 사람만 마을에 있는 거죠. 우리의 일부가 사라져버린 겁니다. 그런데 똑똑한 사람만 남게 된 그 공동체는 과거 일체감을 가진 공동체와 많이 다른 거지요. 심신 상실자와 같은 불완전한 존재들도 여러 하급기능을 수행했어요. 오늘날 그 필요성이 사라졌고, 여러 겹의 원을 그렸던 공동체는 낱낱이 해체됐어요.”

-제목을 ‘사랑이야기’ 풍으로 설정한 것은 의외입니다.

“주인공인 ‘당편이’는 분명 우리가 여자로 의식했고, 어떤 의미에서는 실제로 사랑했던 존재이기도 합니다. 성적으로 불완전하지만. 저는 여자가 평생 두가지 기능을 한다고 보았습니다. 하나는 노동으로 재화를 생산하는 기능이고, 또 하나는 남성과 관계를 가지면서 성적 생산을 하는 기능입니다. 주인공 당편이는 양쪽 모두 불완전한 존재죠. 소설 마지막에서 그나마 행복에 가까운 모습을 보이는 것은, 그의 성적인 부분이 보완되었기 때문입니다.”

-여자는 성적으로 인정을 받지 않는다면 의미가 없다는, ‘반 페미니즘’적 시각이 배경에 깔려 있는 것은 아닌가요.

“그렇게까지 말할 수는 없을 겁니다. 당편이는 사회적으로나 개인적으로 ‘특수한 존재’라는 점을 생각해야 하겠죠.”

-작품 서두는 친구들이 당편이의 행방에 대해 논쟁을 벌이는 데서 시작합니다. 그렇게 풍성한 화제를 마을에 제공했던 당편이인데, 왜 제대로 그의 행방을 아는 사람이 없었을까요. ‘기호 인식의 문제’와 관련되는 것 같습니다.

▼당편이는 고향마을 실화서 따와▼

“어떤 존재가 존재이기 위해서는 다른 존재와의 관계가 핵심적입니다. 사람을 하나의 기호로 본다면 누가 인식하고 인정해줘야 기호로서의 기능을 가지는 것이죠. 작품 후반에 당편이는 나름대로 좋은 짝을 만나 다른 사람들이 염려해주지 않아도 되는, 어떤 면에서는 정상적인 삶에 편입됩니다. 그 순간 공동체는 그에 대한 관심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고향을 배경으로 많은 작품을 쓰셨는데.

“제 집에서 상당 기간 함께 지낸 작가 심상대의 말에 따르면, 내가 고향을 잘 만난 덕분에 좋은 소재를 많이 갖게 됐다는군요. 어릴 때 동네 사람들을 일일이 분류하고, 별명붙이고, 또래끼리 쑥덕거리거나 어떤 사람을 대놓고 놀림감으로 삼곤 했습니다. 그런 기억의 일부를 이번 작품에 그려보았습니다. ‘당편이’의 경우도 의사에게 속아 치부를 햇볕에 말린 여성의 실화에서 따온 것입니다. ”

-본인도 놀림감이 된 적이 있나요.

“숙맥(菽麥) 리스트도 있었는데, 나도 그 중의 하나였죠.”

-결코 영웅이 될 수 없는 돌출적 인물이 주인공이 되고, 그가 시대의 변화에 따라 굴곡많은 삶을 체험하고, 그의 삶에 대한 작가의 숙고가 수놓아진다는 점에서 82년작 ‘황제를 위하여’와 유사함도 느껴졌습니다.

“조금 다르죠. ‘황제’는 정상적이건 아니건 나름대로 자신의 신념체계가 있고, 거기에 따라 시종일관 행동하지만 당편이는 그런 신념이 없어요. 남들이 정해주는 대로 삶이 결정되는 겁니다.”

<유윤종기자> gustav@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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