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잉보호'에 아이들人權 무너진다…'문화과학' 어린이특집

  • 입력 2000년 3월 20일 19시 32분


어른들은 “어린이야말로 ‘미래’의 희망”이라며 ‘미숙한’ 어린이들을 보호와 감시 속에 훈육한다. 특히 핵가족 사회에서 어른들은 삶을 기꺼이 희생하며 어린이를 보호한다. 어린이를 위한 교육 문화 놀이 등 관련산업은 방대한 규모로 성장하고 가정도 어린이를 중심으로 움직인다. 그러나 급속히 변화하는 현대사회에서 이미 자기 시대의 이데올로기에 갇힌 어른들이 자연의 창조력과 가능성을 간직한 어린이들을 ‘훈육’한다는 것이 타당한 일인가.

▼어른들 논리로 가르쳐▼

우리 사회의 교육문제는 제도교육만이 아니라 어린이에 대한 인식의 전환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논의가 일어나고 있는 가운데, 계간지 ‘문화과학’ 최근호(통권21호)는 ‘어린이’ 문제를 기획특집으로 다뤘다. 학술 이론지의 어린이특집은 이례적인 일이다.

고길섶씨(문화비평가)는 발간사에서 “어른은 어린이를 항상 ‘내일’의 존재로만 위치시켜 왔을 뿐 ‘오늘’의 존재로 인정해 오지 않았다”고 지적한다. 그래서 어린이는 항상 “‘미숙하고’ ‘순진무구한’ 존재”로 취급되고 어른들은 자기 시대의 이데올로기에 따라 어린이들을 가르친다는 것이다.

홍성태씨(사회학박사)는 “개구장이라도 좋다 튼튼하게만 자라다오”라는 분유광고 카피가 유행하던 시기의 훈육 이데올로기가 ‘튼튼이’였다면, “아빠보다 더 똑똑하게 키울 거예요”라는 분유광고 카피가 각광받는 지금은 ‘똑똑이’ 이데올로기가 어린이의 세계를 지배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지식사회론, 영어제국주의, 학력중심주의 등의 이데올로기는 바로 ‘똑똑이’ 이데올로기의 기반이다.

조형근씨(서울대 사회학과 박사과정 수료)는 어린이 담론을 통해 어른의 문제를 제기한다. “어린이에 대한 어른들의 폭발적인 관심 증대는 사실 어린이에게로 향한 것이 아니다”는 것이다. 현대사회의 불안한 어른들은 “어린이 속에 잃어버려서는 안되는 ‘자기(self)’가 있다”는 강박관념 속에서 어린이에 열광한다는 것이다.

▼'똑똑이' 이데올로기 문제▼

그래서 배경내씨(인권운동사랑방 인권교육실)는 어른들의 ‘보호’ 명분 아래 어린이들의 인권이 무너지기 시작했다고 비판한다. ‘어린이 만들기’라는 근대적 주체의 형성 과정은 “학교나 가정 등 각종 훈육장치를 통해 어린이를 사회적 종속물로 길들여 온 기계적 과정”일 뿐이라는 것이다. 아울러 고씨는 최근 우리 사회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고 다니는 청소년보호위원회야말로 “이 낡은 근대문화정치의 어두운 권력자”라고 비판한다.

배씨는 어린이가 ‘보호대상’에서 ‘권리주체’로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지금 당장 아이들에게 최선의 것을 제공해 줄 수 있는 사람은 부모도 국가도 아닌 바로 그들 자신”임을 인정하고, 어린이들이 스스로 선택하고 다시 실패를 딛고 일어설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이에 대해 고씨도 “아이들의 감각이 활기찬 개성에 따라 자유롭고 해방된 세계를 지향하도록 하되 타자들의 감각을 착취하거나 지배자의 욕망을 꿈꾸지 않도록 하는 일종의 ‘문화교육’”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권리주체'로 인식 바꿔야▼

홍씨는 나아가 ‘탈학교의 구상’을 제안한다. ‘탈학교의 구상’은 “국민의 교육권을 학교에 국한하지 않고 폭넓게 보장하자는 것이며, 이를 위해 제도화된 학력을 기준으로 구성돼 있는 각종 사회적 선발 및 보상체계를 폐지하자는 것”이다. 그 결과 학력주의가 사라진다면 성장단계에 따라, 또 그와 함께 변하는 취미와 적성에 따라 장래의 삶을 꿈꾸고 일궈갈 수 있는 다양한 형태의 교육이 이뤄질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홍씨는 이런 구상이 다분히 유토피아적인 것임은 인정하면서도 “우리가 ‘다른 삶’을 꿈꾸지 않는다면 현실은 언제나 변하지 않은 채로 남을 것이므로 이제는 ‘어린이 보호’를 넘어서 ‘어린이 해방’을 적극적으로 모색해야 할 때”라고 역설한다. 현실은 공교육 붕괴 위기 속에 조기유학 바람이 거세게 불고 있다.

<김형찬기자·철학박사> khc@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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