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하늘에 달이 없네. 산책을 하려면 달이 있어야지.
자주색 크레파스를 들어 달을 그린다. 달이 나왔으니 산책할 길도 있어야겠지. 길을 걷다 보니 심심해졌다. 숲을 그려볼까?
나무 하나뿐인 작은 숲이다. 나무에 열매를 그리니 사과나무가 되었다. 누가 사과를 따가면 어떻게 하지? 나무를 지켜 줄 용을 그려야지.
크레파스를 든 꼬마 해럴드. 우리가 책을 열 때마다 새롭게 길을 떠난다. 품 안에 쏙 들어올 만큼 작아 보이는 아기이지만, 마냥 작지만은 않다. 자기 허리께에 산을 그리면 해럴드는 산보다 커진다! 산에서 떨어져도 걱정할 것 없다. 풍선을 그리고 대롱대롱 매달리면 되니까. 길을 잃어도 문제없다. 경찰 아저씨를 그리면 길을 물어볼 수 있을 거야.
머리카락도 몇 올 없는 아기 해럴드를 주인공으로 등장시키며 미국에서 40년 이상 사랑받아온 그림동화 시리즈. TV시리즈와 비디오 등으로도 제작됐고 우리에게도 낯설지만은 않은 책이다.
크레파스 하나로 길을 열고 도시를 만들고 꽃들에게 물을 주는 해럴드를 따라가다 보면 어른들마저도 막힌 속이 뚫리는 듯한 상상력의 해방을 경험한다. 이런 주인공과 함께 다니면, 웬만큼 힘든 일이 닥쳐도 풀어낼 수 있는 묘안이 떠오르지 않을까?
크레파스 질감의 굵직한 선과 단순한 구도가 안정감을 주지만 화면의 기발한 배치 때문에 지루한 느낌은 들지 않는다.
마지막은 항상 같다. 해럴드는 자기 집의 침대로 돌아가 잠이 든다.
모험의 끝에 돌아온 침대는 아늑하기만 하다. 이제 안심이다. 책을 읽어준 어른도, 함께 모험을 다녀온 아이도 해럴드와 함께 편안한 잠 속으로 다시 여행을 떠날 수 있을 것이다. 서애경 옮김. 각권 64쪽 6000원.
<유윤종기자> gustav@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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