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외로 본 東亞 80년]기억으로 남은 뉴스 속의 뉴스

  • 입력 2000년 3월 26일 19시 57분


《60, 70년대까지만 해도 대형사건이 터지면 거리에는 어김없이 호외가 뿌려졌다. TV 보급이 지금 같지 않던 그 시절에는 호외도 주요한 속보 매체였다. 동아일보가 발행한 수많은 호외에는 아직도 그때의 흥분과 감동이 남아있다.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대표 호외10선(選)을 통해 한국 근 현대사의 명암을 재조명해본다.》

동아일보의 첫 호외는 창간 보름후인 1920년4월15일 발행됐다. 불행히도 이 호외는 현재 찾을 길이 없으나 다음날인 4월16일 사고(社告)에 그 흔적이 남아 있다.

사고는 ‘본월 15일 발행 본지 제13호는 당국의 기휘(忌諱)에 촉(觸)하야 반포금지를 당하얏삽기 기휘에 촉한 부분을 말소하고 차(此)를 호회로 발행…’이라는 내용. 풀어 쓰자면 전날 발행된 신문에 일제의 검열에 걸린 기사가 있어 이를 삭제하고 나머지를 호외로 만들어 배포했다는 뜻이다. 1925년의 이른바 ‘을축년 대홍수’ 때는 하루에도 몇번씩 호외를 발행하는 ‘호외 홍수’ 시절이었다. 당시엔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의 속보 경쟁이 워낙 치열해 두 신문이 분초를 다투는 호외전을 벌인 것으로 유명하다.

호외 연구가 정운현(鄭雲鉉·대한매일신보 차장)씨는 저서 ‘호외, 백년의 기억들’에서 “조선일보는 당시 동아일보에 대한 열세를 극복하기 위해 호외전에서 승부를 걸다시피한 입장이었고 동아일보 역시 한치도 양보할 수 없는 입장이어서 양사의 호외전은 사운을 건 한판 승부나 마찬가지였다”고 전했다.

1937년 7월7일 발발한 중일전쟁 당시에도 호외가 쏟아졌다. 7월8일 첫 호외를 내고 이후 8월말까지 줄잡아 40회 정도 호외를 찍어냈고 어떤 날은 하루에 3, 4회씩 발행하기도 했다.

해방 직후 한동안은 호외가 많지 않았다. 1945년에서 1955년까지 호외는 4건에 불과했고 1955년부터 1959년까지는 호외가 단 한 건도 없었다. 반면 1960년대에는 호외가 넘쳤다. 한국일보에 이어 중앙일보가 창간되면서 신문사간의 속보 경쟁이 뜨거워져 꼭 호외를 내지 않아도 될 평범한 기사까지 호외를 발행하는 경우가 자주 있었다. 1964년10월의 경우 ‘한국농구 올림픽 본선 진출’(5일) ‘대사급 외교관 대폭 이동’(7일) ‘동경올림픽 속보’(10,11일) ‘소련 우주선 발사’(13일) 식으로 거의 하루 건너 호외를 찍었다.

1970년대 이후에는 호외가 눈에 띄게 줄었다. TV 보급 확대로 호외 발행의 필요성이 그만큼 줄었기 때문. 특히 1990년대에는 △‘전두환씨 국회 증언’(1990년1월1일) △‘김영삼후보 당선’(1992년12월19일) △‘김일성 사망’(1994년7월9일) △‘성수대교 붕괴’(1994년10월21일) △‘대구 지하철 가스 폭발’(1995년4월28일) △‘삼풍백화점 붕괴 속보’(1995년7월3일) △‘KAL기 괌서 추락’(1997년8월6일) 등 7건이 당시 발행된 호외의 전부다.

<송인수기자> issong@donga.com

▼호외 10選▼

▽김상옥 종로경찰서 폭탄 투척 사건(1923년3월15일)

김상옥(金相玉)의사의 종로경찰서 폭탄투척사건도 호외를 통해 알려졌다. 호외가 전하는 김의사의 최후는 처절하리만큼 감동적이다. ‘총을 맞아 숨이 진한 후에도 육혈포에 건 손가락을 쥐고 펴지 아니하고 숨이 넘어가면서도 손가락으로는 쏘는 시늉을 하였다.’

김의사 사건은 발생 두달 후에야 보도됐다. 호외는 이를 ‘당국의 게재금지명령이 엄혹하여 자세한 진상을 보도할 자유가 없었더니 뒤늦게 게재금지를 해제하였기로 즉시 호외를 발행하는 바이다’고 설명한다.

▽순종(純宗) 승하(1926년4월27일)

‘월색(月色)조차 처량한 아래 돈화문 외(外)에는 인산(人山)누해(淚海)’ 조선 마지막 임금인 순종의 죽음을 전하는 동아일보 호외의 머릿기사.

기사 곳곳에 나라 잃은 백성들의 슬픔이 가득하다. ‘어떤 늙은 부인 한 사람이 창덕궁 저쪽으로부터 구슬픈 목소리로 곡을 하며 돈화문 앞에 나타나자 군중들도 일시에 설움이 북바치어 일제히 통곡하기 시작한다. 혹은 엎어지고 혹은 누워서 뒹굴며 혹은 가슴을 두드리고….’

‘종로경찰서에서…땅 위에 엎드려 있는 사람들까지 내일 와서 곡하라고 사정없이 몰아내기 시작했다’는 대목도 있다.

▽손기정 금메달(1936년8월10일)

손기정(孫基禎)선수의 베를린올림픽 금메달 소식 역시 동아일보 호외를 통해 알려졌다. 호외에 실려있는 손씨의 훈련 에피소드. ‘생도들을 제방 일주 장거리 연습시켰는데 한 생도가 커다란 돌을 들고 달리기에 그 이유를 물으니까 맨 손으로 달리면 다른 생도들이 너무 뒤떨어진다고 하더니 나중에 돌을 던지고 쏜살같이 달려 다른 생도들을 멀리 떨구고 골인하더라. 그가 바로 손기정이다.’(신의주보통학교 교사 이일성·李一成)

유명한 ‘일장기 말소 사건’은 이로부터 15일 후인 8월25일에 보도됐다. 이 사건으로 동아일보는 무기정간당했다가 9개월 뒤인 1937년 6월3일에야 속간됐다.

▽김일성 보천보 습격사건(1937년6월5일)

김일성(金日成)의 항일 투쟁도 호외로 다뤄졌다. 북한이 김일성의 대표적인 항일 무장투쟁으로 자랑하는 함남 보천보 우편소 습격사건이 ‘5월5일 오전9시반 체신국 입전’을 근거로 대문짝만하게 실렸다.

‘김일성 일파’의 활동상은 이 후에도 여러 차례 소개됐다. 대표적인 기사만 추려도 ‘김일성 최현 일파 강안재습을 호언’(1937년6월20일) ‘불안한 장백일대, 김일성계 300명 관방자를 습격’(6월23일) ‘김일성파 60명 쌍리두촌습격 동민 40명을 압거’(6월30일) ‘김일성 일파 900 비적 대이동 함남 대안에 불안’(11월21일) 등 여럿이다.

▽3·15 부정선거와 마산사태(1960년4월11일)

‘마산서 오늘밤 중대사태’‘시민 3명 사망설(1명은 확인)’ 3·15 부정선거에서 비롯된 마산사태는 동아일보 호외가 그 불씨였다. 당시 호외는 ‘이날 상오 제1차 데모 당시 행방불명이 된 소년 시체가 발견됨으로써 흥분된 3000여 시민이…살인 선거 물리치라, 시체를 인도하라는 구호를 외치기 시작했다’고 보도. 소년 시체의 주인공은 물론 김주열군. 마산고 재학중이던 김군은 당시 눈에 최루탄이 박힌 시체로 발견돼 마산사태와 4·19의거의 기폭제가 된 것. 보름 후인 4월26일 동아일보 호외는 ‘이승만대통령 하야 용의 성명’을 보도, 이승만정권 붕괴를 예고.

▽5·16쿠데타(1961년5월16일)

‘박정희(朴正熙)시대 개막’을 알리는 5·16쿠데타는 ‘오늘 미명 군부서 반공 혁명’이라는 제목으로 동아일보 호외를 탔다. 부제(副題)는 ‘장도영(張都暎)중장이 총지휘-장면정권을 불신임-군사혁명위서 성명발표’였다. 기사 전체에 박정희라는 이름이 한 줄도 언급되어 있지않다는 게 흥미롭다. 군사혁명위 성명의 마지막 대목은 지금 봐도 헛웃음이 나온다. ‘이와 같은 우리의 과업이 성취되면 새롭고 양심적인 정치인들에게 정권을 이양하고 우리들 본연의 임무에 복귀할 것이다.’

▽윤보선씨 공화당 자금 의혹 폭로(1963년10월9일)

‘공화당은 공산당 자금으로 조직됐다.’

5·16쿠데타 주역인 공화당 박정희후보와 대통령선거에서 맞붙은 민정당 윤보선(尹潽善)후보가 경북 안동 유세에서 제기한 의혹. 윤후보에 따르면 김종필(金鍾泌)씨가 간첩 황태성(黃泰成)으로부터 20만달러를 받아 이 돈으로 공화당을 공산당 식으로 조직했다는 것.

박후보는 이에 대해 “내가 만약 빨갱이라면 어떻게 육군 소장까지 했겠는가. 사단장을 하다 사단을 끌고 북으로 넘어가면 어떻게 하려고 나를 사단장으로 임명했겠는가”라고 반박. 그때만 해도 박후보가 ‘색깔론’의 피해자였다는 게 흥미롭다.

▽최은희 신상옥 피랍(被拉), 탈출(1984년4월2일, 1986년3월18일)

영화감독 신상옥(申相玉)과 배우 최은희(崔銀姬) 부부는 북한 피랍과 북한 탈출로 각각 동아일보 호외의 주인공이 됐다.

피랍 호외는 ‘홍콩에서 실종된 것으로 알려졌던 최은희와 신상옥이 북괴에 의해 강제납치돼 현재 북한에 있음이 확인됐다’는 안기부 발표 내용.

그러나 이로부터 약 2년후 두 사람은 북한 탈출에 성공해 또다시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다.

오스트리아 빈에 묵고 있던 두 사람은 택시 편으로 미국 대사관으로 피신해 신변 보호를 요청한 것.

▽12대총선 신민당 돌풍(1985년2월13일)

선거 때면 어김없이 호외가 쏟아졌다. 선거 다음날 아침 독자들은 눈을 뜨자마자 동아일보 호외를 통해 밤새 진행된 개표 결과를 확인하곤 했다.

신민당 돌풍이 분 12대 총선 다음날 배포된 호외는 당시 김대중(金大中) 김영삼(金泳三)씨가 급조한 신민당이 민한당을 제치고 제1야당으로 부상한 사실을 보도하였다. 반면 민한당은 전국구를 합해 34석에 그쳐 11대 총선 때 보다 크게 퇴조했고 민정당은 원내 1당에 많은 전국구를 배정하는 제도에 따라 원내 과반을 넘는 138석을 확보.

▽김일성 사망(94년7월9일)

6·25의 전범(戰犯)이면서 동시에 분단 50년사의 주역이었던 북한 김일성의 사망 소식은 이날 정오 평양방송의 특별방송으로 알려졌다. 동아일보는 곧바로 호외로 만들어 뿌렸다.

당시의 ‘김일성 사망’이라는 제목은 그 때까지 발행된 호외중 가장 큰 활자여서 눈길. 그러나 불과 3개월 뒤 ‘성수대교 붕괴’ 호외 때 이 보다 더 큰 활자가 뽑혀 기록 갱신.

‘성수대교 붕괴’ 호외는 거의 기사 3단 크기로 아직까지도 이 부문 최대 기록.

▼정진석교수 한마디▼

호외는 한낱 신문 조각에 불과할지 모르나 그 속에는 뉴스 이상의 의미와 감격이 담겨 있다. 특히 일제시대 발행된 호외에는 남다른 역사성이 있다. 당시에는 조선총독부 경무국 도서과 검열계에서 매일 신문을 검열했는데 내용이 ‘불온’하면 해당 부분을 빼거나 고쳐서 배포했기 때문에 그 시절 호외에는 호외 이상의 의미가 있다.

신문사끼리 과당 경쟁을 하느라 호외가 남발된 때도 있었다. 60년대의 경우 신생 신문사가 독자들에게 경품을 준다는 내용까지 호외로 제작하는 경우도 있었다.

촌각을 다투는 제작 환경 탓에 오보(誤報)가 잦은 것도 부인할 수 없는 호외의 한 특성이다. 1986년 11월17일 ‘북한 김일성(金日成) 사망’ 호외가 대표적인 예. 당시 언론은 북한의 대남 확성기 방송을 근거로 오보를 냈다.

신문이 역사의 기록이라면 호외는 그 중 주요 대목을 발췌한 사초(史草) 중의 사초인데, 신문사는 물론이고 학계 등에 아직 호외 발행일지조차 없어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

정진석<외국어대학교·신문방송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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