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특집]횡설수설 휴지통의 80年史

  • 입력 2000년 3월 29일 19시 46분


《올해로 창간 80주년을 맞은 동아일보의 기사중 창간무렵에 생긴 두 개의 고정란 ‘횡설수설’과 ‘휴지통’.

‘횡설수설’은 국내 언론사상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칼럼이다. 말의 가로(橫) 세로(竪) ‘누비기’를 통해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분야를 거침없이 비판하고 날카롭게 분석해온 명 칼럼. 1920년 7월25일 창간 100호를 기념해 첫선을 보였다.

‘휴지통’은 200자 원고지 한두장에 불과한 분량이지만 그 시대의 사회상과 서민들의 애환과 정서가 압축돼 담겨있다. 이는 휴지통란의 장수 비결이기도 하다. 》

▼횡설수설▼

‘횡설수설’은 국내 언론사상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칼럼이다. 말의 가로(橫) 세로(竪) ‘누비기’를 통해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분야를 거침없이 비판하고 날카롭게 분석해온 명 칼럼. 1920년 7월25일 창간 100호를 기념해 첫선을 보였다. 창간 100호를 기념한 첫회부터 암울한 시대와의 불화를 토로하며 일제에 대한 도전을 선언한다. “정리(正理) 직론(直論)이라고 자신해도, 신문지를 경찰서로 실어가 ‘언론자유’가 참혹하게 유린되는 판인데, (중략) 쌍꺼풀 치켜뜨는 무섭고 지긋지긋한 광경을 보기 쉽지만 도리어, 그래서 횡설수설이 그 가치가 없지 않을 터이다.”

조선인의 권리를 외신을 빌려 촉구하는 대목이 눈길을 끈다. ‘주미 일본대사는 미국 클리블랜드에서 연설을 하며 미국에 사는 일본인에 대해 정당하고 평등한 대우를 하라고 열렬히 요구했다. 그러나 대사여, 귀관의 동포(일본인)는 조선에서 어떤지 아는가. 일본인들은 보통학교 교육용어를 조선어로 하자는 조선인의 요구조차도 용맹스럽게 반대하지 않는가. 내가 싫은 것을 남에게 강요하는 것이 일본인의 민족성인가.’(22년 5월10일자)

23년 1월 서울 종로경찰서에 폭탄투척 사건이 벌어지자 일제는 보도제한에 나섰다. 이에 16일자 횡설수설은 ‘폭탄이 터지고 범인은 못잡아 태평에 취한 경무 당국의 뇌신경이 급격히 착란하였는지 보도제한이 상규에 벗어나, 아무리 공평한 처지에서 관찰해도 냉정한 태도라 할 수 없으니’라고 대항했다.

청년 문인 김우진과 가수 윤심덕의 현해탄 투신자살에 대한 26년 8월6일자 코멘트. ‘전도 다망(多望)한 청년남녀의 경솔한 최후’라고 나무라면서도 식민지 상황과 결부시켜 ‘착잡한 사회환경을 생각할 때 그들의 심경도 다소 동정할 점이 없지 않다. 하지만 삶의 의의와 가치가 결코 연애만이 아니거늘, 중대한 책임을 지닌 조선 청년으로서!’라고 적고 있다.

부정부패에 대한 칼날같은 공격도 눈에 띈다. ‘검사에게 붙잡혀 갈 때까진 한푼도 돈을 먹지 않았다고 하는 것이 수뢰 고관들의 상투적 수법, 수회(收賄)와 거짓말, 이것이 고관의 자격인지!’(29년 12월29일)

태평양전쟁이 격화되고 일제가 단말마적인 언론 압제에 나설 때인 40년 8월11일 폐간호. 초가을의 수심을 빌린 고별사가 슬프도록 아름답다. ‘섬돌에 잠겼던 벌레소리 이슬 적시고, 푸른 들을 거치는 바람끝이 가벼우니, 이것이 수심(愁心)인가, 가을의 감상(感傷) 때문에 추심(秋心)은 수심(愁心)이거늘. 벌여놓은 것 거두어들이고, 시작한 것 끝맺는 때라 인간의 희비 양면이 앞서고 뒤서고, 수심중에 희망도 오락가락. 서늘한 바람에 기운을 일으키어 정진 매진(邁進), 실속 있는 수확이 있도록.’

횡설수설이 다시 독자와 만나기 위해서는 45년 광복, 50년 6·25전쟁을 거치도록 15년여를 기다려야 했다. 55년 1월1일부터 ‘매서운 붓끝’ 횡설수설이 다시 연재된다. 자유당 정권 치하에 민심 흐트러지고 금력 권력이 판치는 세태에 한 청년이 격분, 제 손가락을 잘라버린 사건을 언급한다. ‘옛날 중국에서 사어(司魚)라는 이가 혼미한 임금을 깨우치기 위해 죽고 제 시체까지 내세워 간(諫)했다고 해서 시간(屍諫)이라는 말이 나왔다. 우리 혼탁세태와 사악한 현실이 통골(痛骨)할 노릇이라.’(55년 2월18일)

천재 물리학자 아인슈타인의 작고시에는 석학의 타계를 애도하며 ‘이땅의 공부도 않고 학자연하고 저작가처럼 행세하는 부끄러운 학문풍토’(55년 4월20일)를 개탄했다. 경찰관의 횡포에 대해서는 ‘다른 나라에는 헌법 등 6법이라는데 우리는 무법 불법을 합쳐 8법국가냐? 민중의 지팡이냐, 아니면 몽둥이냐?’(55년 8월6일)고 힐난했다. 호색한 박인수 사건에 대해 이른바 ‘법은 보호할 가치가 있는 정조만 보호한다’는 판결을 내리자 “오입쟁이 남자는 환호할지 몰라도 정조에 여당 있고 야당 따로 있는 것이 아닌 이상, 정조도 법앞에 평등”(55년 10월11일)이라며 일침을 놓았다.

60년 4·19의거의 날, ‘서울시내를 흔들던 요란한 총소리에 공포에 떤 시민들. 데모대의 장정들이 나무토막처럼 쓰러지는 무시무시한 광경’을 적은 횡설수설의 약 3분의 1은 검열의 칼에 파인 상처 그대로 남아 있다. 70년대 들어 횡설자의 눈길은 변화된 사회상에 자주 머문다. 공중전화부스에서 뒷사람을 아랑곳하지 않은 채 수다떠는 처녀에게 꾸지람(70년 7월3일)하기도 하고, 72년 8·3사채동결 조처가 발표되자 “빚을 쓴 어떤 이는 ‘단비가 내렸다’고 한다. 그러나 돈준 이가 사색이 되고 있는 판에 돈 쓴 기업주들이 고급외제차나 별장에 눈독을 들일까 걱정이다”(8월4일)고 코멘트.

80년 들어 어두운 유신시대의 종언과 함께 민주화 바람이 불었다. 횡설자는 ‘간혹 철 잊은 찬바람이 황량한 겨울을 느끼게 할 때도 있겠으나 봄은 착실히 깊어질 것이요, 종당에는 민주화의 꽃을 피울 것이다’(3월28일)고 기원한다. 그러나 신군부의 계엄 검열은 심해지고 횡설수설란에도 구멍이 나고 임시광고로 거기를 메우는 일이 잦아진다.

5공이 파탄에 직면한 87년 이한열군의 장례행진을 보는 횡설수설에는 슬픔의 물기가 배어있다. “장례행진이 거리를 지나간다. ‘민주를 위하여 자주를 위하여, 이땅의 인간 해방을 위하여, 새벽 찬이슬에 젊음을 삼킨다’는 그의 시처럼 떠나간다. 한맺힌 죽음은 이것으로 마지막이 되어야 한다”(7월9일). 90년대 노태우 비자금 사건이 불거지자 ‘대통령과 경호실장이 깡패식 주종관계’에서 벗어나야 한다(95년 10월25일)고 질타했다.

<김충식논설위원>searskim@donga.com

▼휴지통▼

‘(총독부) 정무총감 수야련태랑씨는 조선에 드러온 후에 조선말을 공부하얏는대….’

1920년 4월 10일, 동아일보 지령(紙齡)으로는 제8호 3면에 처음으로 등장한 ‘휴지통’란의 내용이다.

1년 전 일어난 3·1독립만세운동의 여진이 가라앉지 않은 분위기를 반영하듯 휴지통자(子)는 정무총감에게 ‘요보라는 개소리는 횡혀나 배호지 마랏스면…만세라는 말이 엇더한 말인지 투f히 궁리하는 것이 뎨일 긴급한 일이 안일는지’라고 권유한다.

올해로 창간 80주년을 맞은 동아일보의 기사 중 창간 무렵에 생긴 고정란으로는 ‘횡설수설’과 함께 아직도 유지되고 있는 ‘휴지통’. 이 난은 200자 원고지 한장을 겨우 넘는 분량이지만 그 시대의 사회상과 서민들의 애환과 정서가 압축돼 담겨 있다. 이는 휴지통란의 장수 비결이기도 하다.

같은 해 4월 17일자 휴지통은 ‘해괴한 것은 총독부의 변소인데 고등관 변쇼이니 판임관 변쇼이니 구별이 있는 것이다. 고등관이 내여 놋는 것과 판임관이 내여 놋는 것이 무엇이 다른지’라며 신분과 지위에 따라 차별이 심했던 당시 상황을 보여준다.

‘조선사람들이 서로 긴(金)상이니 사이(崔)상이니 하는 것은 대단히 괴상한 말이다…구차히 외국말을 혼용하려 함은 내 집에 육미봉탕 팔진미를 두고 남의 우거지국이 좋다고 빌어 먹으려 하는 것’(4월 27일)이라며 일제시대 일부 조선인의 친일의식을 꼬집기도 했다. 이 글은 동아일보가 총독부로부터 1차 정간을 당하는 구실이 됐다.

일제시대 서민들의 정서를 대변했던 휴지통은 40년 8월 10일 총독부가 동아일보를 강제 폐간시킴에 따라 사라졌다가 해방 이후인 45년 12월 1일 복간호와 함께 5년 4개월만에 다시 등장했다. ‘형님은 북쪽에 아우는 남쪽에…편지 한장조차 떠올 길이 아득해 딱두하여 답답두하여’라고 분단의 안타까움을 나타냈다.

‘커피 값이 해방 직후 五원, 지난 여름에 백五십원, 재료값이 빗싸다고 이번에 단번에 껑충 二백원으로 올랐다’(50년 1월 6일) ‘요즘 커-피는 엉망진창…빗갈부터가 마치 중대가리 씻은 물처럼 흐접지분하다’(56년 1월 21일)는 내용은 당시로서는 신상품인 커피에 대한 선호도와 이를 악용한 바가지 상혼을 지적한다.

국산품 애용운동이 국가적으로 절실했으나 국산품의 품질이 형편없었던 당시 시대상도 휴지통에서 볼 수 있다. ‘총리가 공무원에게 양담배 피면 자미없다고 경고하지만 맛은 고사하고라도 호주머니에 넣고 다니면 언제 없어졌는지도 모르게 빈 가치가 되어 버리고 게다가 여기저기 구멍이 뚜더져…三分之二가 피지도 않고 없어지는 따위의 담배가 어디 있단 말이요?’(53년 1월 15일)

‘요즘 일체의 신규전화 가설이 중지되자 본인도 모르는 새에 인감위조 등으로 명의변경이 돼 버리는 경우가 허다하다. 눈감으면 코 비어간다’는 얘기(64년 1월 18일)는 전화가 희귀했던 시대의 한 단면.

또 ‘서울시 3천여 직원들이 시무식에서 남녀 할 것 없이 모두 돌격 건설이란 표어가 붙은 노란 헬메트에다 작업복을 입고 일제히 건설의 진군을 다짐했다’는 뉴스(67년 1월 5일)는 조국 근대화와 도시 건설에 대한 한국인의 열정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알려준다.

일본인의 기생관광이 극성이던 76년의 9월 4일자 휴지통은 ‘일본인 이와모토가 73년부터 2개월에 한번씩 우리나라에 와 관광기생 등 한국여성과 사귀어오다(그 중 한명인) 모여대 1년생(19)이 다른 일본인과 어울리자 학교를 찾아가 비행을 일러바쳤다’는 씁쓸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밤 12시부터 통행금지가 실시되던 상황이라 ‘밤 11시55분경, 한 경찰관은 가도 좋다고 하고 다른 경찰관은 붙잡아 가니 어느 장단에 춤을 추어야 되느냐’는 택시운전사의 하소연(79년 8월 24일)도 나온다.

80년대에는 12·12군사반란과 5·17쿠데타로 집권한 5공 정권에 저항하는 대학생 시위가 끊이지 않았는데 81년 3월 20일자 휴지통은 ‘시위 현장에서 2백여m 떨어진 공사장에서 남녀인부 20명이 (학생들이 자갈 철근 각목을 갖고 가지 못하도록) 비상경계망을 폈다’고 전한다.

버스카드제를 실시중인 지금은 상상하기 어렵지만 ‘서울 성동구 자양동 ○○교통의 안내양 기숙사에서 기숙사 실장인 조모양(22) 등이 삥땅 여부를 조사한다며 동료 안내양 이모양(16) 등 12명에게 강제로 옷을 벗게 하는 등 몸수색해서’(82년 6월 12일) 말썽을 빚은 때도 있었다.

연세대 이화여대 숙명여대에 다니는 여대생들이 ‘여대생 먹고살기 대책위원회’라는 눈물겨운 이름의 단체를 만들었다는 소식은 국제통화기금(IMF)체제 여파로 경제난이 한창이던 98년 6월 26일자에 실렸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 휴지통란에 실리는 내용은 다양하게 바뀌어왔지만 형식과 원고량은 거의 변치 않고 그대로 유지돼 오고 있다.

<송상근기자>songmo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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