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 속으로]한강 소설집 '내 여자의 열매'

  • 입력 2000년 3월 31일 21시 17분


한강 소설집‘내 여자의 열매’

시인에게 사물이란 사물 그 자체인 동시에 그것을 넘어선 뭔가의 계시이다. 시인은 사물의 감각적 구체에 충실하면서 또한 그것 너머의 진실과 통정하는 언어를 꿈꾼다. 그래서 시인은 종종 은유에 끌린다. 은유는 감각과 관념, 현실과 이념이 아날로지의 원리에 따라 한몸이 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시인만이 아니다. 시심(詩心)이 있는 작가면 누구나 은유적 언어의 마술에 매혹되곤 한다. ‘내 여자의 열매’의 저자 한강은 그런 작가 중의 한 사람이다.

‘내 여자의 열매’는 무엇보다도 꽃의 은유가 압도적인 소설집이다. 꽃의 이미지는 인간 실존에 대한 암시가 태어나는 장면들 곳곳에서 출현한다. 그것은 작중인물 주위의 풍경만이 아니라 어머니가 인내하는 마음으로 베끼는 보살 초에도, 엄마에게서 버림받은 외로운 아이의 머리핀에도, 사찰의 경내에 밝혀진 연등에도, 존재의 전환을 꿈꾸는 아내의 상상의 몸에도 존재한다. 이 꽃의 은유는, 대범하게 말해서, 욕망의 질곡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개인의 열망을 나타낸다. 꽃은 대지에 뿌리를 두고 있으면서도 하늘을 향해 가지를 뻗는 나무에 피어나 그 초월의 열망을 구현한다.

한강 소설의 인물들은 예외없이 결핍에 시달리고 있다. 가족은 결손을 입었고, 부부는 환멸을 겪었으며, 연인은 사랑을 잃었고, 젊은이들은 외롭고 궁하다. 그런 만큼 그들은 강하게, 뜨겁게, 질기게 욕망한다. 때때로 ‘불’이나 ‘칼’의 비유로 표현되는 그 무서운 욕망은 그들을 한 마리 짐승으로 만든다. 한강 소설의 초점은 바로 그 짐승의 조건과 싸우는 개인의 내면적 경험이다. 작중인물들이 자신을 사로잡은 욕망의 동물적 성격과 그로 인한 존재의 왜곡을 깨닫는 지점에서 꽃 또는 식물성의 세계는 구원의 빛처럼 다가온다.

소설집 표제작은 이러한 개인의 자기구원을 향한 행로를 예시하기에 충분한 작품이다. 어머니처럼 될까 두려워 바닷가 빈촌의 집을 떠난 열일곱살 이후 이곳저곳을 전전한 젊은 여자. 언제나 달아나고만 싶었던, 그러나 어디에서도 행복하지 못했던 그녀는 탈주를 반복하는 대신에 선택한 결혼에서도 불만을 느낀다. 사랑의 밀월을 넘기고 권태로운 일상을 살고 있는 지금 그녀는 아파트 베란다의 식물처럼 존재한다. 하지만 그녀의 변신이 전락은 아니다. 그것은 짐승의 욕망을 스스로 버리고 생명의 죽음과 재생의 질서 속으로 비상하는 계기이다. 그녀는 ‘온 가지를 힘껏 벌리고 가슴으로 하늘을 밀어올리는’, 그렇게 하여 ‘집’의 내재성을 넘어서는 삶을 꿈꾼다.

인간 욕망의 식물적 정화를 얘기하는 한강 소설에는 우리가 보통 시라고 바꿔 부르기를 주저치 않는 고결한 영혼이 있다. 이 시의 세계는 소설이라는 문학의 천출(賤出)이 그 낯뜨거운 본색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는 듯한 최근의 소설들 사이에서 단연 아름답다. 한강의 시심은 치명적으로 약한 인간들의 욕망을 품어안고 그것을 보다 나은 삶에 대한 희미하나 간절한 희망으로 부화시킨다. 그 마음은 읽는 이의 마음까지 따뜻하게 한다.

불만이 없진 않다. 짐승의 조건과 싸우는 개인의 내면을 관찰하면서 한강은 종종 욕망의 규율에 대한 공감으로 나아간다. ‘붉은 꽃 속에서’는 아예 사문(沙門)에 들어 번뇌의 소멸을 구하는 젊은 여자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마음의 통제가 가져다주는 자기초월의 의의를 부정하고 싶진 않지만 그것은 소설에 기대할 만한 인간 구원의 형식은 아닌 듯하다. 보살행에 대한 애착은 욕망의 활동에서 생성되는 재앙과 축복의 풍부한 드라마로부터 소설을 멀어지게 만들 염려가 있다.

보살적 삶의 문제는 은유적 글쓰기의 문제와도 통한다. 은유는 초월적 욕구와 합치되는 세계의 이미지를 제시하는 반면에 삶의 우발적, 경험적 연관을 몰라보게 만든다. 그것은 한강 자신의 꽃의 은유가 그렇듯이 인간 현실을 물질적, 사회적 활동의 맥락 속에 이해하게 하기보다 어떤 이상화된 관념 아래 장악하게 하는 것이다. 시심이 소설 속에 거주하는 올바른 방식이 있다면 그것은 어쩌면 시심 자체를 수사화하려는 궁리가 아니라 시심을 위태롭게 하는 현실의 정체를 알려는 노력일지 모른다.

황종연 (문학평론가 · 동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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