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강남구 J중학교 3학년△반 교실. 맨 앞줄에 앉은 한모군(15)의 불만에 찬 목소리가 김모교사(43)의 귀에 또렷이 들려왔다.
“으이그∼저 오버로드(Overload).”
매섭게 한군을 노려보며 김교사는 뭔가 말을 하려 했지만,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10여초 뒤 김교사는 다시 판서를 시작했다.
▼모르면 당한다▼
오버로드는 PC게임 ‘스타크래프트’에 등장하는 세 종족 중 저그(Zerg)의 한 유닛(Unit)으로 움직이는 속도가 매우 느린 캐릭터다.
이 캐릭터의 수에 비례해서 다른 유닛을 생산할 수 있으며, 숨어 있는 적을 찾아낼 수 있는 능력이 있다. 때문에 모습을 감추고 공격하는 적으로부터 우리편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오버로드를 적재 적소에 미리 배치해야 한다. 물론 한군이 김교사를 ‘오버로드’라고 한 것은 필요한 인물이어서가 아니라, 동작이 굼뜨면서도 딴 짓하는 학생을 귀신같이 집어 내기 때문.
그러나 김교사는 한군을 혼낼 수 없었다. 왜? 오버로드가 뭔지 몰랐기 때문에.
▼모범생은 없다▼
서울 W고등학교 김모군(16)은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컴퓨터를 했다. “컴퓨터를 누구에게 배웠느냐?”는 질문에 “컴퓨터를 왜 배우냐? 그냥 하는거지” 대답하는 김군.
집에 오면 으레 인터넷에 접속, 좋아하는 연예인의 동영상이나 음악 그림파일을 검색하고 숙제에 필요한 정보검색을 하기도 한다. 그래픽 도구인 ‘포토샵’에 관심이 많은 그는 이 소프트웨어에 관련된 최신 정보를 찾는 수단으로도 인터넷을 이용.
반에서 1, 2등을 다투는 그는 현재 대학과정의 물리를 공부하며 전국 물리경시대회를 준비하고 있지만 일부 교사들의 눈에는 모범생인것만은 아니다.
3월 초 윤리시간. 반 아이들이 떠들었다는 이유로 윤리교사는 모든 학생들에게 벌점을 1점씩 줬다. ‘어떤 경우에 벌점이 몇점이 되는지 벌점 조항을 미리 알려주지도 않고 벌점 주는 게 어디있어?’싶어진 김군은 ‘짝짝짝’ 그 자리에서 크게 박수를 쳤다. 그러자 반 아이들도 동조했고 윤리교사는 김군에게만 벌점 10점을 추가로 줬다.
‘개길까?’ 김군은 그러나 참기로 했다. ‘저 사람은 저 사람대로 스타일이 있는거고 나도 그렇잖아?’
▼권위는 없다▼
서울 J초등학교 교사 임모씨(50)는 “특히 요즘은 아이들 앞에서 조금이라도 논리의 허점을 드러내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논리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는 순간 선생님은 ‘만만한 상대’가 되기 때문”이라는 것.
아날로그시대의 권위는 나이에서 나왔다. 처음보는 사람끼리도 나이를 물은 뒤 위아래를 정했다.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창구가 많지 않았던 시절에는 나이가 곧 그 사람의 지식수준과 정보량을 대변해 주는 ‘지표’였다.
그러나 디지털키드에게 정보는 넘쳐난다. 인터넷의 수많은 정보 중에서 필요한 정보를 가려내는 능력인 ‘노웨어’(Know-where)가 중요할 뿐. 컴퓨터게임을 통해 자연스럽게 컴퓨터와 친해진 덕에 그들의 사고는 매우 논리적이다. 더 이상 디지털키드에게 ‘나이’와 ‘직위’ ‘계급’으로 권위를 부여받을 수는 없다.
▼이제는 인정할 때 ▼
서울 J중학교 박모교사(28)는 수업 시작후 20분정도가 지나자 분필을 놓았다. “야∼어제는 정말 죽는 줄 알았어, 얘들아. 핵폭탄이 발사가 됐는데, 도데체 빨간 점을 찾을 수 있어야지.”
이 학교에서 몇 안 되는 ‘스타를 할 줄 아는 선생님’인 박교사는 학생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짱’이다.
컴퓨터에 좀처럼 다가서지 못하는 기성세대와 컴퓨터와 함께 자라고 있는 디지털키드. 둘 사이의 연결고리는 어쩌면 컴퓨터밖에 없을까.
한국청소년상담원의 이호준상담원(부모교육담당). “기성세대의 가장 큰 문제점은 디지털키드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한다.
디지털키드의 변화를 아날로그 세상이 따라가지 못할 뿐 아니라 어떻게든 막으려 든다. 자녀가 컴퓨터에 대해 깊이 알고 스스로 ‘나는 점점 더 똑똑해지고 있다’고 느낄수록, 부모는 자신감을 잃어가며 ‘내가 이러다 아이에게 휘둘리지…’ 걱정 때문에 자녀를 더욱 억압해 문제가 생긴다는 지적이다.
문화평론가 김지룡씨는 “21세기에는 ‘권위’의 뜻을 새로 정해야 한다”고 말한다. “요즘 아이들은 버릇없다”라는 말하는, 수직적 사고에 젖었으며 인터넷을 모르는 어른들. 나이를 인정하지 않고 자기 나름대로의 논리기준에 따라 상대방을 하나의 ‘유닛’으로 보는 디지털키드와 어른들이 화합하는 길은 서로를 ‘장악’하는 게 아니라 ‘인정’하는데 있다는 얘기다.
서울 W고 1학년 홍모군(16)은 “분명 틀린 정보를 어디서 듣고 와서는 잔뜩 잘난체하며 수업분위기를 주도하려는 선생님들은 교실에서 좀처럼 학생들과 눈을 마주치기 힘들다”고 털어놓는다. 그러나 선생님이 아닌 하나의 ‘유닛’으로서, 수업시간에 졸고 있는 제자에게 다가가 “우리, 조금만 더 함께 고생하자”라며 어깨를 두드려주는 교사를 만나면 제 아무리 튀는 디지털키드라도 모니터 밖의 세상을 따뜻하게 느낀다고 했다.
<나성엽기자> newsd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