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출산이 서해를 앞두고 그 거친 숨을 잠시 몰아 쉬며 호흡을 고르는 구릉 아래의 동네 전남 영암군 군서면 구림리. 일찍이 왕인(王仁)박사가 논어와 천자문을 갖고 일본으로 떠난 상대포 항구가 가까이 있어 ‘왕인 박사의 마을’로 유명한 이 곳은 1987년 이화여대 박물관이 우리 나라 최초의 유약 도기 가마터(9세기 통일 신라시대)를 발굴하면서 전남 강진(청자) 경기 광주(백자)와 더불어 ‘도기의 마을’로도 알려졌다.
역사적 도기를 빚어낸 붉고 고운 황토는 지금도 마을과 근처 농토 곳곳에 흩어져 있고 주민 1200명이 사는 400가구의 집들 대부분도 황토로 만들어진 토담집이어서 아직도 흙의 전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이 마을에서 ‘제1회 흙의 예술제’(3월 29일∼6월 28일)가 열리고 있다. 이화여대 박물관과 영암군이 영암 황토의 우수성과 마을의 역사적 가치를 널리 알리기 위해 예술가들을 초청해 올해부터 격년으로 예술축제를 벌이기로 한 것.
‘구림 마을 프로젝트 1’이란 타이틀의 이번 첫 행사에는 육근병 이불 조덕현 이형우 윤석남 임옥상 임충섭 민현식 등 8명의 현대미술가와 건축가가 참가해 9점의 작품을 전시하고 있다. 나선화(이화여대 박물관 학예연구실장) 박경미(전 국제화랑 큐레이터) 두 사람이 예술제를 조직했다.
작품들은 이화여대 박물관과 영암군이 구림 도기의 연구 전시를 위해 지난해 폐교를 활용해 지은 ‘영암도기문화센터’ 내부 전시실과 구림 마을 곳곳의 야외공간에 전시되고 있어 관람객은 고색 짙은 마을을 한 시간 남짓 산책하며 작품들을 감상할 수 있다.
시신을 넣어 묻던 고대의 옹관에 미래의 로봇인 사이보그를 넣은 이불의 작품 ‘사이보그--’는 시공을 초월해 삶의 원형 속에 숨어 있는 신화를 건져내는 작업. 또 곡괭이 호미 거위알 등 흙으로 빚은 갖가지 모양의 소품들을 마을의 한 민가 마당에 늘어놓은 이형우의 작품(무제)은 인간의 본능적 표현욕구인 손놀림이 흙과 불을 만나 만들어내는 인간의 근원적 소박함을 드러낸다.
봉분 형태의 흙 구조물과 그 안에 설치된 비디오 눈, 그리고 당산목 가지에 걸린 도기(陶器)로 된 청홍색의 종(鍾) 240개와 마을 주민의 염원을 적어 매단 종이쪽지들. 도기센터 마당에 작품 ‘구림의 나라’를 전시한 육근병은 “과거의 역사가 깨어나 현재를 응시하는 가운데, 바닷바람에 흔들리는 종들의 울림이 주민들의 염원과 함께 나부끼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개 형상의 유물 수십 기가 출토되는 발굴현장을 만든 조덕현의 작품 ‘프로젝트-구림(狗林)’은 이 마을의 역사를 뒤집어 보는 작업. 구림의 ‘구’가 비둘기 ‘구(鳩)’가 아니라 개 ‘구(狗)’란 가정 하에 잃어버린 신화를 되찾는 시도를 한다.
임옥상은 주민과 함께 흙과 돌로 담을 쌓아가는 작품 ‘세월’을, 윤석남은 조선 시대 여인들의 고난과 애환을 담은 두 작품 ‘조각배’와 ‘성혈’을 각각 전시하고 있다. 또 임충섭은 물 위에 떠 다니는 조각들이 바람에 따라 움직이는 모습을 통해 옛 사람들의 죽음의 달관을 나타낸 ‘풍장(風葬)’을, 민현식은 구림 마을의 길과 수로를 마치 반도체의 집적회로처럼 꾸민 ‘구림 마을의 길의 공간, 물의 공간’을 선보였다.
박경미는 “작가들은 이 마을의 응축된 역사성과 공간의 아름다움을 오늘의 삶에 연결시키는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영암=윤정국기자> jkyoo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