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사람]김지연씨 사진집 '연변으로 간 아이들'

  • 입력 2000년 4월 7일 20시 03분


‘옥수수 잎을 흔들며 지나가는 바람소리가 죽 끓이는 소리 같아요.’

1999년 초가을 중국 옌볜. 사진작가 김지연(29·청강문화산업대 강사)의 캐논 EOS5 파인더 안에 들어온 아이가 그렇게 말했다. 옥수수대를 안은 아이의 함박웃음 때문에 하마터면 한편의 목가적 풍경으로 보일 사진. 아이는 배고픔을 견디다 못해 목숨을 걸고 국경을 넘은 북한의 꽃제비(거지)였다.

“허겁지겁 밥을 떠 넘기던 아이들이 카메라 셔터 소리를 들으면 그냥 숟가락을 내려 놓았어요. 내가 왜 사진가가 됐는가, 왜 저 아이들 옆에 그냥 앉아있을 수 없는가… 사진가가 된 걸 후회했습니다.”

김씨의 사진집 ‘연변으로 간 아이들’(눈빛)에 실린 50장의 사진은 대개 인물이 주제다. 그러나 온전히 얼굴이 드러난 사진을 찾기 어렵다. 쓰레기더미, 커튼, 뿌연 유리창, 하다못해 작은 두 손으로라도 제 얼굴을 가려야 하는 아이들. 얼굴이 알려지면 강제송환 후 무슨 일을 당할지 알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가려진 얼굴, 등과 뒤통수만 나온 모습이 ‘모든 것’을 말한다. 김씨는 짧은 사진설명만을 붙였다.

‘소나무껍질조차 남아있지 않은 땅에서 온 소년은 삶은 계란을 처음 먹어본다고 했다.’

‘리OO 열일곱살 키 1m42 남자, 리OO 열네살 키 1m36 여자.’

10년전 고교 졸업과 함께 프랑스 유학을 떠날 때만 해도 김씨는 이런 내용으로 첫 사진집을 묶게 되리라고는 상상조차 못했다. 또래인 명지대생 강경대가 시위진압과정에 숨졌을 때도, 성수대교와 삼풍백화점이 무너졌을 때도 김씨는 대학(에콜 데 보자르 생 테디엔)에서 ‘순수 예술사진’에만 몰두했었다.

‘세계적 아티스트’라는 꿈이 너무 먼 곳에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뒤의 귀향. 좌절감에 한동안 사진기를 놓았던 그를 일으켜 세운 것은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의 삶을 증언한 변영주 감독의 영화 ‘낮은 목소리’였다.

“아주 작은 변화였죠. 나같은 사람도 세상을 위해 뭔가 할 일이 있겠구나, 그렇게 생각하며 다큐멘터리 사진으로 방향을 바꾸었습니다.”

당초 옌볜으로 간 것은 소외된 이들을 돌보는 성직자들을 찍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곳에서 김씨는 꽃제비를 만났다. 아니 “느꼈다”. 석달기한의 비자를 끊어 재입국했지만 체류기간 40일 중 보름 동안은 그저 아이들과 어울리기만 했다. 그가 찍으려 한 것은 동포의 ‘굶주리고 처참한’ 모습이 아니다.

“정말 가슴이 아플 때는 아이들이 웃음, 또래에 대한 연정, 사춘기의 반항같은 자연스러운 감정을 보여줄 때였습니다. 우리를 닮은 아이들, 그 아이들이 왜 굶주려야 하는지, 제 사진을 통해 그걸 생각하고 나눌 수 있었으면….”

사진집 판매수익은 전액 ‘꽃제비를 지원하는 모임(외환은행 116-18-22856-0 김지태,꽃지모)’ 기금에 적립된다.

<정은령기자>ry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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