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년 등단한 작가는 지난해 소설집 ‘검은 이야기 사슬’ 과 중편 ‘하품’을 내놓았다. 지금까지 나온 분량보다 더 많은 두 권의 새 책에서 작가는 권태, 차츰 소멸해가는 존재, 무의미한 대화 등 특유의 소재와 수법들을 집요하고 정교하게 반복한다. (괄호 안의 인용문은 단편 ‘어두운 화면 위의 느슨한 말들’에서 인용)
<일상이 보급하는 권태는, 그 자극적이지 않은 권태는, 그것이 제공하는 감미로움에 적응하기만 하면 즐거움의 이유가 될 수도 있다>
‘하품’ 등 앞선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두 책의 등장인물은 무의미한 행위를 거듭하며 이에 만족한다. 단편 ‘내장이 꺼내진 개’의 주인공은 개미를 죽이는 일처럼 ‘다른 생각을 하지 않고 그것에 전념할 수 있는 일’에 탐닉하며 “나의 삶은 나의 모든 노력을 초월한 곳에 있다”고 말한다. ‘재촉도 지연도 없는 시간, 와해된 공간 속에서 지하수처럼 흐르고’(회저의 시간) 있는 시간 속에 살고 있는 한, 권태는 불가피하며 또한 필수적이다.
<죽음이 우리의 가장 가까운 존재인 것은(…) 그것이 결코 우리를 저버리는 일이 없는, 우리의 마지막 동반자라는 사실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그것의 양해하에 삶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에 있다>
권태의 연쇄고리 속에서 인물들이 지향하는 종착점은 ‘무(無)속에서 쉬고 있는 것들에 합류(…)고스란한 붕괴’ (핏기 없는 독백)이자, 곧 죽음이다. 행려병자, 중환자, 기억상실자인 주인공들은 육체의 짓무름을 통해, 노쇠를, 희망 없는 삶을 통해 점차 흔적없이 사라져간다. 주인공이 이야기를 진행시켜 나가는 것 조차 ‘숨을 거두기 전까지 살아 있는 데 대한 구실을 만들 수도 있는’ 때문이다.
<그가 생각하는 진정한 소설가의 임무는 이미 빈사상태에 처해 있는 소설의 죽음에 완전한 종지부를 찍는 것이다.>
작가가 여러차례 밝혀온 대로 그의 전략은 소설의 부정에 이른다. 줄거리를 불구로 만들고, 주인공의 말을 자기부정의 늪에 파묻고, 의식의 고리를 이리저리 얽어매 끝없이 헤매게 만든 뒤 주인공을 사망에 이르게 한다.
결국 무엇이 죽었을까. “실제로 태어난 적도, 산 적도, 죽은 적도 없는 나는 그 무한한 세계의 지평선 너머에서 아무런 꿈도 꾸지 않는다”(핏기 없는 독백) 라고 선언할 때 사라진 것은 여태까지 주인공의 발화(發話) 그자체.
<뭔가에 대한 재능의 부족이 다행인 경우가 있다. 가령, 대중적인 글을 쓸 수 있는 재능의 결핍에 대해 그는 감사한다>
작가는 지난해 9월4일자 동아일보 문화칼럼에서 ‘인류가 존재하는 한 사라지지 않을 어둠에 대해 말하는 작품,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리라는 기대를 처음부터 저버리고 들어가는 작품, 대중의 몰이해를 각오하는 작품’의 필요성을 주문했다.
그러나 작가의 의도가 배반당할지 모른다는 ‘우려’를 완전히 지울 수 없다. 단편 ‘분열증’의 실내극적 구도, 또는 다른 단편 ‘괴저’에 나타나는 차가운 풍자가 기자에게만 사뭇 재미있게 읽히는 것이 아니라면.
<유윤종기자> gustav@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