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공평하다. 영원한 제국과 영원한 식민지도 존재하지 않는다. 개인사도 그러하다. 영원한 가해자도, 영원한 피해자도 없다.
지난해 존 쿳시(60)에게 영국 문단 최고 영예인 부커상을 안겨준 ‘추락’(원제 Disgrace)은 바로 이 점에 천착한다. 흑인에게 정권이 넘어간 남아프리카 공화국 한 백인교수의 치욕스런 추락 과정에 돋보기를 들이댄다.
세상에 무신경한 50대 이혼남인 주인공 루리는 어린 제자와 스캔들을 일으킨 뒤 ‘절제할 수 없는 충동’이라고 자신을 변호하던 인물이다. 하지만 유배지 삼아 들어간 딸 루시의 농장에서 딸이 인근 흑인들에게 집단 강간을 당한다. 다른 딸에게 했던 일이 자신의 딸에게 몇 배로 되돌아 온 것이다.
작가는 ‘자업자득’(自業自得)의 도덕률을 설파하지 않고 두 세대의 상반된 대응방식을 섬세하게 그려내는데 초점을 맞춘다. 무기력한 아버지는 네덜란드로 도피를 권하지만 딸은 폭력의 땅에 남아있을 것을 고집한다. 아프리카를 사랑하는 딸에게 ‘강간은 머물기 위해서 치러야 하는 대가’일 뿐이다. 그렇다고 섣부른 인종 화해의 제스처 대신 현실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체념의 정서에 기울어 간다. ‘떠남은 곧 패배를 인정하는 것’이란 자기변호에서 철 지난 제국주의적 자존심마저 엿보인다.
남아공 케이프타운대 문학교수인 존 쿳시는 1983년 ‘마이클 K의 삶과 세월’에 이어 부커상 31년 역사상 최초로 2회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아파르트헤이트(인종분리주의) 치하의 삶을 우회적으로 묘사한 작품은 종종 현실 지향적인 나딘 고디머와 대비되기도 한다.
쿳시는 ‘추락’에서도 흑백갈등이 꿈틀거리는 혼란스런 사회상을 몇 명의 등장 인물간의 관계 속에 축약시켜 놓았다. 주인공의 ‘죄와 벌’에 영국 시인 바이런의 파란만장한 인생을 겹쳐놓아 문학적 상상력을 자극하고 있다. 감정의 기름기를 쫙 뺀 건조한 어투와 뚝뚝 끊은 단문체도 인상적이다. 번역투의 이물감이 들지 않는 것은 역자인 전북대 왕은철교수(영문학)가 불명확한 부분을 작가에게 직접 물어가며 한국어로 옮긴 덕이다. 동아일보사 펴냄.
<윤정훈기자> digan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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