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게임계의 우상인 이노 켄지(30)의 자서전에서 뜻밖의 단초를 발견할 수 있다. 켄지는 20대에 새로운 개념의 롤 플레잉 게임(RPG) ‘D의 전설’(1995)과 ‘에너미 제로’(1996)를 탄생시켜 게임의 천재로 꼽히는 인물.
짐작과는 달리 그는 어릴적부터 골방에 틀어박혀 컴퓨터와 전자오락 미쳐있지 않았다. 초등학교 때 비틀스에 심취했고 신디사이저 음악을 들으면서 ‘예술적 테크놀러지’를 동경했던 평범한 소년이었다. 억압적 교육환경에서 반항아로 변했던 중 고교 시절에는 철학과 클래식 음악에 눈을 떴고 여행 소설 등으로 견문을 넓힌다. 그때까지도 ‘벽돌깨기’ 같은 컴퓨터 게임은 한갓 ‘재미없는 장난감’에 불과했다.
하지만 중소 게임개발업체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만든 게임들이 열광적인 반응을 얻게 된다. 눈이 번쩍 뜨일만한 화려한 그래픽 때문만은 아니었다. 게임의 새로운 컨셉과 심오한 철학적 내용을 모티브로 한 빼어난 독창성이 큰 몫을 차지했다.
예컨대 딸이 아버지의 환영을 좇아 무의식의 기억을 더듬어가는 과정을 게임으로 만든 ‘D의 식탁’의 주제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존재론적 질문이다. 또 우주선에 홀로 넘겨진 소녀가 살아남기 위해 외계괴물과 싸운다는 내용의 ‘에너미 제로’의 주제는 ‘나는 생각한다,고로 존재한다’는 데카르트의 테제였다. 둘 다 ‘게임의 차원을 넘어선 쌍방향 영화의 탄생’이란 상찬을 얻은 바탕에는 탄탄한 인문학적 소양이 깔려있었던 것이다.
시각장애인을 위해 소리만으로 즐기게 만든 ‘리얼 사운드-바람의 리그렛’(1997)은 학창시절부터 예민하게 길러진 켄지의 감수성이 탄생시킨 작품이다. 못 이룬 첫사랑을 찾아가는 내용의 아름다운 내용이나, CD 케이스에 새로운 사랑을 싹틔워 보라는 뜻으로 허브씨를 넣은 세심한 배려가 돋보인다. 이밖에도 실전처럼 흥미진진하게 그린 게임 개발기에도 우정, 인간관계, 철학, 장인정신 같은 아날로그적인 덕목을 중시하는 면모가 물씬 풍긴다.
에필로그에서 그는 디지털 키드에게 이렇게 말한다. “이 세상에 태어난 이상/ 게임처럼 살아갈 수 밖에 (…) 하루빨리 당신만의 게임이 시작되기를.” 정윤아 옮김. 283쪽 8500원.
<윤정훈기자>digan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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