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생각을 삶의 구석구석에 드러내며 철두철미하게 거기에 매달려 살았던 민족으로서 고대 이집트인들을 앞설 자는 아마 없으리라. 초기 왕조시대 파라오의 무덤으로 조성됐던 80여 기의 피라미드 모두가 당시 수도였던 멤피스 서쪽의 나일강 너머에 있다. 게다가 신왕국시대의 도읍지 룩소르는 아예 나일 동안(東岸)에다 신전과 왕궁, 일반 주택들로 이루어진 산 자(生者)들의 도시를 세우고, 서안(西岸)에는 오로지 무덤으로만 된 죽은 자(死者)들의 도시를 건설하여 동과 서를 극단적으로 대비시켜 놓았다.
룩소르는 이렇듯 ‘삶과 죽음 사이엔 강이 흐른다’는 고대 이집트인들의 특이한 공간의식과 생사관을 여실하게 보여주고 있다. 카이로에서 720km나 떨어져 있고 목젖을 태울 정도로 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이 곳이 늘 관광객들로 붐비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고대이집트인들은 왜 그 같은 극단적 공간의식을 갖게 됐을까. 이집트는 국토의 96%가 사막이다. 땅을 적실 물과 식물이 자랄 수 있는 비옥한 충적토를 쉼 없이 날라다주는 나일강이 없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과 함께 ‘이집트는 나일강의 선물’이라 했던 헤로도투스의 말이 실감났다.
이집트인에게 물질적 풍요를 안겨주었던 나일강은 남에서 북으로 흐른다. 그것도 거의 직선을 그리며. 강폭이 넓고 수량 또한 풍부한 나일강으로 인해 땅은 동서로 나뉠 수밖에 없었고 그렇게 나뉜 동과 서는 지리적 환경마저 크게 달라 쓰임새 또한 다르다. 강을 두고 나타난 자연지리적 차이는 동과 서를 극단적으로 대비시키는 이집트 특유의 디자인 개념을 낳았고 그것은 다시 이집트 문명이란 형태로 구체화됐다.
버스와 열차 등 모든 교통수단이 룩소르에 멈춰서고 이곳을 찾은 관광객들이 묵을 수 있는 숙소는 평평한 땅이 제법 넓게 펼쳐진 나일강 동안에 있었다. 이곳에는 집과 건물뿐 아니라 도로도 있고 그늘을 드리우는 수목도 있으며, 파라오가 신관들의 도움을 받아 태양신 라(Ra)에게 제사를 드렸던 거대한 룩소르 신전과 카르나크 신전의 유적도 있었다. 태양을 상징한다는 높다란 오벨리스크가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곳도 물론 이 동안이었다.
이에 반해 룩소르 신전 앞 나루에서 셔틀보트를 타고 건너간 서안은 황량한 산들의 연속이었다. 쉴새 없이 미네랄 워터의 신세를 져야 할 만큼 지독하게 더운 그곳에는 왕의 계곡, 왕비의 계곡, 제전 등 온통 죽음과 관련되는 것뿐이었다. 파라오의 무덤이 60여 기나 발견됐다는 왕의 계곡은 일년 내내 비 한 방울 내리지 않는 곳이라 풀 한 포기 볼 수 없었다. 이곳은 그들의 믿음으로는 육신이 부패하지 않는 미라로 영원히 존재할 수 있는 곳이었다. 그들이 살아 생전 그토록 소망했던 재생은 죽음과 동시에 육신에서 떨어져 나간 혼령이 육신과 재결합함으로써 이룰 수 있었는데 그 제일 조건은 살아 있을 때의 모습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매년 나일강이 범람하여 땅의 상태가 바뀔 수도 있는 녹지는 안식하는 데 적합하지 않았다. 그런데다 영원히 빛나는 태양, 유유히 흐르는 나일, 무한한 창공, 끝없이 펼쳐진 사막…. 가시적인 것이긴 하나 그 한계를 가늠하기 힘든 이런 자연현상들을 통해 시간은 직선으로, 그리고 영원히 흐른다고 생각하여 스스로 영생하기를 바랬으니 부동(不動)의 공간인 이 나일 서안이야말로 제2의 삶의 거주지로 더할 나위 없는 적지였던 것이다.
무엇보다도 강을 따라 난 좁디좁은 녹지는 산 자들이 곡식을 일구며 삶을 이어가야 할 땅이었는지라 죽은 자들까지 끼어 들어 그것을 축내선 안 된다고 그들은 생각했다. 제2의 삶을 위해 이승의 삶을 온통 다 바친 것처럼 보이는 고대이집트인들의 삶의 이면에는 이렇듯 현세적 삶에 대한 지극한 배려가 숨겨져 있다.
이런 생각은 이승의 삶이 만족스럽지 않고서는 결코 하기 어려웠다. 이는 누구 한사람 기가 죽어 고개를 떨구고 있거나 슬픈 표정을 짓고 있는 사람을 볼 수 없는 그들이 남긴 그림으로도 증명된다. 고된 노동에 임해서도 모두 고개를 곧추 세우고 정면을 바라보고 있으며 또 자신감에 넘친다. 설령 그곳의 메마른 땅이 시신의 부패를 용납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해도 현세의 삶이 만족스럽지 않고서야 어찌 이승의 삶을 이끌었던 육신을 미라로 만들어 영원히 보존하고자 했으며, 또 그것을 그대로 재생하고자 했겠는가.
하지만 인도땅의 힌두교도들은 주검을 불(火)로서 멸(滅)하고 그 재를 갠지스 강물 위에 뿌렸다. 비가 많이 내리는 갠지스강 유역은 높은 습도 때문에 모든 것이 쉬 부패하므로 태우는 것 이상으로 깨끗한 뒷처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부패(decay)는 생명체의 해체를 뜻한다. 그러나 그것은 새로운 생명의 탄생을 위한 밑거름으로 작용한다. 따라서 자연은 순환구조 속에서 움직이게 되고 죽음 또한 윤회와 환생을 맞으며 끝없이 이어지게 된다. 그래서 인도인들은 영생의 관념은 갖지 못 했으나 대신 10진법을 고안한 이집트인들이 해내지 못한 ‘0’이란 숫자를 창안할 수 있었다.
순환은 그러므로 단순한 반복이 아니다. 거기에는 ‘다시’와 ‘새롭게’란 의지가 담겨 있다. 모든 것을 원점에서 바라보기 때문이다. 생의 마지막 순간, 갠지스 강변의 성지 바라나시를 찾아와 흔쾌히 자신을 불태우고는 한줌의 재가 되어 강물 위에 뿌려지기를 바랬던 것은 이승의 삶을 이끌었던 육신의 탈을 멸해야만 고해로부터 벗으나 열반에 이를 수 있다고 믿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나일강과 갠지스강. 둘 다 문명을 잉태한 큰 강이나 나일강변 사람들은 이승의 삶을 긍정하며 저승에서도 현세와 똑같은 삶이 지속되기를 바랬던 데 반해 갠지스강 사람들은 이승의 삶을 부정하며 저승에서는 좀더 나은 삶을 살기를 기원했다. 전자는 종교를 낳지 못했으나 후자는 위대한 종교를 낳았다. 거기엔 구원의 메시지가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외형적으로는 그 강 위에 비가 내리느냐 아니냐 하는 차이밖에 없는데도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삶은 이토록 달랐다.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다르지 않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권삼윤(문화비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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