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민미술관 임영선展]화가의 가슴은 불타 그을린 작업실

  • 입력 2000년 4월 25일 19시 49분


예술작품은 미술관이나 화랑 같은 공공장소에서 관람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미술관을 찾는다. 그러나 미술관에서 창작되는 건 아니다. 아뜨리에(작업실)에서 제작된다. 예술활동의 현장은 여기에 있다. 작가가 고민하고 울부짖으며 몸부림치는 현장이다. 작가는 제작하던 작품을 느닷없이 짓이기고 부수며 때로는 고함치며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경우도 있다. 마음 먹은 대로 표현되지 않기 때문이다. 또는 일단 제작된 작품이 작가의 한계를 물증(物證)으로 비웃듯이, 작가를 소외(疎外)시키기 때문이다. 작품이 작가를 보고 ‘당신은 이렇게 밖에 그릴 수 없는가…?’고 신랄하게 꾸짖기도 한다. 이러한 벙어리 냉가슴을 관객은 모른다. 그래서 작가는 마음을 다져먹고 또다시 작업을 시작한다. 더 나은 작품을 생산하기위해…. 이처럼 작업실에서는 적나라하게 예술이 숨쉰다. 그리고 이러한 반복은 작가가 생존하는 날까지 지속된다. 93세에 타계한 피카소가 7만점의 회화를 남겼다는 것도 이러한 프로세스의 결과다.

그런데 임영선은 온통 불에 타고 그을린 흔적으로서의 작업실을 전시하고 있다. 작품보다도 그것을 창조하는 주체의 심정을 표현한 것이라고 하겠다.

읊지 않는 시인이란 있을 수 없다. 그리지 않는 화가도 있을 수 없다. 제 아무리 자신이 천재라고 마음먹어도 소용없다. 한번 그려봐야 한계를 알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그 한계를 극복하려고 다시 붓을 든다. 이것의 끊임없는 되풀이가 화가의 일생이다. 표현하려는 주관적 심정과 그것을 표현한 작품 사이에는 늘 마찰(摩擦)의 변수가 따른다. 이 은밀한 비밀이 충동하여 이제까지 열심히 그리던 작품을 불문곡직으로 부수기도 한다. 불을 지르고 작품과 함께 타버리고 싶은 충동은, 그 작가의 진실성과 비례한다. 예술가를 ‘절대(絶對)의 노예’로 비유하는 까닭이다. 이러한 자기부정의 되풀이가 작가를 성숙시킨다.

이번 임영선의 발표는 한 예술가의 라이프 퍼포먼스를 표현한 예라 하겠다. 눈에 보이지 않는 예술가의 심정에 불을 지른 작품이라고 하겠다. 흔적은 남는 것이기 때문이다.

유준상(서울시립미술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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