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 속으로]정영문 장편 '핏기없는 독백'

  • 입력 2000년 4월 28일 19시 34분


인간 문화의 다른 모든 형식들과 마찬가지로 이야기는 불멸에 대한 욕망을 표현한다.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삶을 그 무자비한 소멸의 운명으로부터 구해내는 것, 시간의 잔해로부터 기억의 집을 지어내는 것이다. 이야기는 덧없고 어지러운 삶의 경험에 일정한 질서를 부여함으로써 그것을 의미가 통하게 하고 사람들의 기억 속에 살아남게 한다. 이야기 문화는 어쩔 도리 없이 맞이하게 되는 죽음 앞에서 인간이 고안한 영생의 비결이다. 세헤라자데는 그녀를 부른 폭군에게 죽임을 당하지 않으려고 한도끝도 없이 이야기를 하고 있지 않은가.

정영문의 장편 ‘핏기 없는 독백’의 일인칭 화자 역시 죽음이 임박한 시점에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는 밤의 어둠에 둘러싸이고 구더기가 들끓는 방안에 혼자 누워 자신의 삶이 종국에 이르렀음을 느낀다. 그러나 그가 하는 이야기는 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죽기 위한 것이다. 자칭 ‘저주받은 혈족의 마지막 승계자’인 그는 ‘자연스런, 비참한 종말’을 기다리며 아직 남은 목숨의 지루함을 달랠 요량으로 자신이 살아온 삶의 누추한 내력을 이야기한다. 이야기가 끝나는 순간 삶도 끝났으면 하는 것이 그의 소망이라면 소망이다.

삶의 끝은 삶의 다른 어떤 순간보다 특별하다. 살아온 과거의 흩어진 조각들이 서로 맞춰져 마침내 어떤 모양을 이루고 의미를 계시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영문 소설에서 임종의 순간은 의미라는 기적을 낳기는 커녕 오히려 의미의 여지를 없앤다. 작중화자가 과거 속에서 건져올린 유랑, 수용, 축출, 걸식의 일화는 통일된 서사적 플롯에 따라 그럴듯한 삶의 모양을 이루는 대신에 삶이란 조작된 환상이며 의식의 과오임을 시사하는 단편화된 우화로 기능한다. 이야기의 효용이나 이야기하기의 능력에 대한 회의가 계속해서 끼어들어 어쩌면 가능할지 모를 플롯조차 차단하는 그의 이야기 서술은 그 자신의 말마따나 ‘아무것도 아닌 것에 이르기 위한 방법’에 불과하다.

이처럼 이야기하기라는 행위가 일종의 니힐리즘적 실천으로 나타나는 배경에는 인간 존재 자체의 무의미함에 대한 남다른 감각이 있다. 작중화자가 ‘자연물의 일부’이기를 원했음을 토로하는 요양원의 이야기를 비롯한 여러 가지 일화에서 그는 ‘서 있기’에 대한 집념으로 대표되는 인간의 모든 문화적 공작의 이면에서 아무런 의미도 없는 자연의 법칙과 그것에 예속된 인간 존재의 굴욕을 지각한다. 그가 지향하는 것은 모든 허위의 제도를 모욕하고 인간 존재의 ‘슬픈’ 진실을 시인하는 것, 한마디로 ‘누워 있기’이다. 비루한 삶은 그가 알고 있는 진정한 실존의 유일한 길이다. 궁극적으로 죽음에 대한 자축을 부르는 그러한 길은 그 자신을 초라하게 작은 반점으로 축소시키지만 동시에 무한한 우주의 크기로 확대시킨다. 그에게는 이야기를 하는 행위도 실은 자신을 비루하게 만드는 행동, 이를테면 ‘배변’에 다르지 않다.

‘핏기 없는 독백’은 역설에 기초한 소설이다. 삶을 의미있게 하는 이야기의 형식을 가지고 의미의 불가능성을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영문의 메타픽션적 역설은 현실과 허구, 의미와 무의미의 경계를 넘나드는 유쾌한 혼란이 부족하다. 삶의 부조리 혹은 무의미에 대한 정연한 사변이 오히려 단조로울 정도로 지배적이다. ‘불경의 언어’를 말하는 언어는 너무 경건하고 ‘배설의 힘’을 말하는 수사는 너무 청결하다. 소설의 빛나는 대목은 ‘맹목의 수레에 실려, 권태의 대기를 가로질러, 끝없는 미로를 지나온 나의 삶’ 같은 수사가 아니라, 요양원 여자가 동료직원 남자와 덤불속에서 거친 섹스를 끝낸 다음 땅바닥에 배변을 하고 사라지는 행동에 관한 서술에 있지 않을까.

황종연 <문학평론가·동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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