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를 도라고 말하면 그것은 늘 그러한 도가 아니다. 이름을 이름지으면 그것은 늘 그러한 이름이 아니다.”(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
노자는 ‘도덕경’의 첫머리부터 논리적인 언어로 담아내지 못하는 세계가 존재한다며 언어로 세상을 바라보아서는 안 된다는 점을 일깨우고 있다. 그런 그도 자신의 그 같은 주장을 언어를 통해 밝힘으로서 어쩔 수 없이 인간의 모순된 상황을 보여주게 됐지만 나는 거기서 도덕경의 세계는 언어(로고스)로 구축된 서구문명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됐다.
문자언어는 시간적 공간적 제약을 뛰어넘어 다양한 생각을 압축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아주 효과적인 수단으로서 인류는 이를 이용해 고도의 문명사회를 이뤘다. 그러나 언어는 하나의 약속체계로 늘 변화하는 만물의 모습을 온전히 그려내지 못한다는 근원적인 한계를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노자는 변화하는 사물 그 자체에 주목하라며 뭇 변화를 담아낼 수 있는 가능성으로서의 ‘빔’(虛)을 강조했다. 같은 동양문화권에서 태어난 불교 역시 공(空)을 말했다. 인간의 언어가 아닌 사물의 본질에 주목하라는 동양사상은 하나같이 자연(自然·스스로 그러함)과의 일체를 최고의 가치라 가르쳤다.
그런데 재미난 것은 ‘구약’이 태어난 소위 ‘약속’의 땅에서는 언어의 힘을 무엇보다도 강조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며 빛이 있었고”(창세기 1:3)로 시작되는 구약에선 모든 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창조됐다고 기록돼 있기 때문이다. 같은 언어를 두고서도 동양과 서양은 이처럼 서로 상반된 입장을 보인다. 그 까닭이 궁금했던 나는 현장을 답사하다 보면 어떤 실마리라도 잡을 수도 있겠다 싶어 ‘출애굽’ 길, 그 중에서도 모세가 불타는 떨기나무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는 유서 깊은 현장이자 그가 출애굽 과정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십계명을 받았다고 하는 시내(시나이)산을 찾았다.
옛날 출애굽의 출발점이었던 지금의 카이로를 떠난 성카타리나수도원행 버스는 한동안 코발트빛의 이름다운 홍해를 보여준 다음 시나이반도 한가운데에 있는 목적지에 닿았다. 계곡 속의 수도원은 육중한 담장에 둘러싸여 마치 요새처럼 보였다. 오래 전 이곳에 수도원이 세워진 이유는 단 하나. 모세가 불타는 떨기나무 가운데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던 곳이라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다음날 새벽 시내산에 올랐다. 정상까지는 2시간 40분이 걸렸는데, 그곳은 우리네 산야에서 볼 수 있는 그런 모습이 아니었다. 표면은 둥글둥글한 돌로 뒤덮여 있고 색깔은 마치 불에 그을린 것처럼 흑갈색을 띠고 있었는데 지평선과 맞닿은 하늘은 온통 붉은 물감을 칠해놓은 듯 밝게 빛나고 있었다. 드디어 일출의 장관이 펼쳐졌다. 모두 시선을 거기에 맞추고 입가에는 엷은 미소를 띄며 조용히 흥분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장엄한 일출장면이 벌어지고 있는 시내산 정상은 모세가 십계명을 받았던 현장이다.
십계명은 하나님이 출애굽 백성들에게 내린 명령으로서 율법적 성격을 갖고 있다. 율법은 외재적으로, 다시 말해서 창조자로부터 주어진 것으로 신과 인간과의 관계를 규율한다는 점에서 보통의 법과는 다르다. 인간의 경험이나 지혜에 근거한 법은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규율하나 율법은 그렇지 않다. 거기에 대해서는 어떤 의문도, 자기류의 해석도, 비판도 용납되지 않는다. 오로지 복종만 있을 뿐이다. 이것을 어기는 것은 큰 죄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을 떠나야 했던 것도 바로 이 때문이 아니었던가. 그러므로 율법적 전통을 가진 민족들은 모두 약속을 중요시한다. 그들이 최고의 성전(聖典)을 ‘약속’(Testament)이라 부르는 데서도 알 수 있다.
율법은 형식상으로는 계약의 형태를 취한다. 모세도 시내산 정상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십계명을 산 아래로 가져가 백성들에게 들려주고는 그들의 동의를 구했다. 그래야만 약속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인정한다는 약속을 했고, 하나님은 그에 대한 대가로 구원하겠다는 약속을 했던 것이다. 율법의 세계에선 이처럼 ‘기브 앤 테이크’의 원리가 작동한다. 그래서 타산적이고 또 무언가 꾸민 듯한 냄새가 난다. 율법의 바탕이 되고 있는 창조론은 작위적인 세계관이란 느낌을 지울 수 없는 것이다. 후대에 이 지역에서 태어난 또 하나의 종교인 이슬람(Islam: 신에 대한 무조건적 복종을 뜻함)도 유일신을 믿으며 율법서인 쿠란을 최고의 경전으로 삼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기간 동안 만난 가장 높은 산(해발 2285m)인 시내산은 고요하고 신비스럽다. 어떤 신성함을 느끼게 한다. 신을 만나기에 참으로 좋은 곳이다. 신의 음성 또한 또렷하게 들을 수 있다. 그러나 이보다도 더 강하게 나를 사로잡은 것은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찾아보기 힘든 불모성이었다.
그러나 우리 동양인들이 일상에서 만나는 것은 물기가 있는 녹색의 공간이다. 생명의 원천인 물이 있어 이곳은 무언가가 태어나고 자라며 쇠하고 멸하는, 늘 움직임이 있는 생명의 세계인 것이다. ‘세상은 늘 변한다. 고정불변 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메시지야말로 이곳에서 태어난 위대한 지혜의 서(書), 도덕경과 주역의 핵심이 아니었던가.
생명이란 변화에 다름 아닌 바, 생명이 자라지 않는 땅이란 변화가 없는 세계인 것이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이처럼 변화가 없는 곳을 택해 율법을 내렸다. 율법은 약속을 바탕으로 하기에 당초 약속을 하게 되었던 그 구조에 중대한 변화가 있어서는 안 된다. 그러니 변화가 없는 땅만큼 ‘약속을 지킨다’는 사실을 상징적으로 표현해 주는 것은 달리 없으리라.
또 율법의 세계에선 창조론이 지배한다. 메마른 이곳의 주된 생업은 유목이다. 그러나 인간은 가축들에게 먹일 목초를 키우지는 않는다. 목초가 있는 풀밭으로 가축을 데려다 놓을 뿐이다. 그러면 가축들이 스스로 배를 불린다. 그러다가 풀이 떨어지면 새로운 풀밭을 찾아 떠나면 된다. 누군가가 풀밭을 가꾸어놓았기에 내가 그럴 수 있다고 믿는 그들은 신의 존재, 나아가 신의 창조작업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자기 몸을 움직여 생명체를 키워야만 삶을 이어갈 수 있는 동아시아 농경문화권에서는 스스로가 창조작업에 참여하는 것인 만큼 별도의 창조자를 상정할 이유가 없다. 창조론이 끼어들 수가 없는 것이다. 대신 자연과 생명체가 만나서 이루어내는 뭇 변화에 주목했다. 그 변화란 것도 누군가의 프로그램에 의해 작동되는 것이 아니라 우연의 결과로 보았다. 이 ‘변화의 책(The Book of Changes)’이라는 ‘주역’이 태어난 것은 이곳에서 결코 우연일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변화에 익숙한 삶을 살았던 우리는 왜 ‘변화의 시대’인 지금, 서양에 뒤처지고 있는가. 산업화시대 모방화시대를 지내오는 사이 변화의 감각을 잃었기 때문일까. 그렇다면 우리의 원래 감각을 되살리는 일이야말로 급선무일 것이다.
권삼윤(문화비평가)tumida@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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