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 '풀하우스'로 일본 이즈미쿄카상과 노마문예 신인상을 받았으며 1997년 '가족시네마'로 아쿠타가와상을 수상해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한 재일교포 유미리.
작년말에는 만삭의 모습으로 나타나 미혼모를 선언한 그가 이번에 44개의 장에, 47개의 낱말에 얽힌 자전적 이야기를 모은 에세이집을 펴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한번쯤은 타인의 인생을 훔치고 싶은 욕망을, 또는 내 인생으로부터 도망치고 싶다는 욕망을 가져본 적이 있을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 역시도 유미리의 이야기에 많은 공감을 하게 되었다. 그건 아마도 누구나 한번쯤은 해보았을, 아니면 경험해 봤을 가출이나 자살 기도에 대한, 어쩌면 자신이 처해 있는 상황으로부터의 도피에 대한 공감일 터.
작가는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들을 사전 형식을 통해 가감없이 잘 묘사하였다. 온전치 못한 가정에서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던, 항상 친구들에게 이지메를 당하거나 아니면 자기보다 나이가 한참 많은 유부남을 사랑할 수밖에 없었던 그에게는 행복했던 과거를 찾기란 어렵다.
때로는 웃음으로, 때로는 아픔으로, 때로는 슬픔으로 가득찬 길지않은 인생을 에세이에 고스란히 담았다.
그녀만의 단어에 대한 정의가운데 가장 설득력있는 몇 가지. '전화-부가기능을 더하면 더할수록 대화하는 도구로서의 기능은 멀어진다' 그렇다. 이제는 전화가 주기능인 대화의 수단이라기 보다는 신용카드 결제나 필요한 물품을 구입하는 등의 부가 기능으로서 사용하는 경우가 더 많이 늘어났다. 하지만 만약 전화의 주기능인 대화가 없어진다면 부가기능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애완동물 기르기-처음에는 사랑으로 시작했다가 무관심해지고, 끝내는 역겨움으로 종말을 고하는 인간의 애정 생활을 동물에게 추체험시키는 행위'
나도 초등학교 1학년때 학교 앞에서 산 병아리가 이틀도 안돼 뻣뻣하게 굳은 채 죽었다. 그후 새라는 족속을 무진장 싫어하게 되고.
'비밀-절대로 지켜지지 않는 약속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공유하는, 친해지기 위한 의식' 등….
유미리는 "자신을 한 단어로 정의한다면?"이란 질문에 "어리지만 몸 속에 인생을 지나칠 정도로 채워넣기 위해, 토해내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는 불행한 사람"이라고 정의한다.
만약 '나'라는 사람을 한마디로 정의한다면? 글쎄…
이 책을 읽고 난 사람이라면 한번쯤은 생각을 해볼듯 싶다.
한 순간만이라도 나 스스로에게, 또 나를 아는 타인에게 솔직해 질 수 있는 나만의 정의를 만들어 놓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