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와 로마, 이들은 서구문명을 떠받치는 두 개의 기둥이다. 그러나 이 둘은 너무나 다른 성격을 갖고 있다. 그리스인들은 좁은 도시국가(polis) 체제 속에 살면서 개인의 자유를 존중하며 민주주의를 꽃피운 데 반해 로마인들은 거대한 영역을 아우르는 대제국을 건설했다. 뿐만 아니라 로마인들은 개인의 가치나 행복보다 제국의 번영을 앞세웠다.로마는 그리스문화를 이어받았는데도 왜 이런 길을 걸었을까.
로마 시내에 흩어져 있는 옛 유적들을 여러 날 다녀봤어도 얻지 못했던 해답은 로마에서 멀리 떨어진 서아시아 땅에 남겨진 도시 유적을 답사하며 찾을 수 있었다. 참으로 뜻밖이었다. 그런 의미에서도 로마는 제국이었다. 로마제국은 여러 폴리스가 병존하면서 각자의 개성을 자랑하던 ‘다양성’의 그리스가 아니라 하나의 ‘통일된’ 세계로서의 로마의 확대판이었던 것이다.
요르단의 수도 암만에서 북쪽으로 40㎞쯤 가면 제라시(Gerash)에 이르게 된다. 이곳에는 1∼3세기 로마제국의 동방거점도시 중 하나로 크게 융성하던 시절에 세워진 주피터신전과 아르테미스신전, 야외극장, 욕탕, 시장터, 타원형 광장, 열주(列柱)거리 등 당시의 도시구조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하나같이 로마식이라 ‘동방의 로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중에서도 압권은 돌기둥이 커다란 타원형을 그리는 ‘타원광장’과 거기서 시작되는 열주도로였다. 대리석으로 잘 빚은 돌기둥을 양쪽으로 마치 가로수처럼 세워놓아 특이한 아름다움을 발하고 있었다. 길바닥도 맨땅이 아니었다. 돌을 꼼꼼하게 박아 단단하기 이를 데 없는 것이 18세기에 발굴된 폼페이의 길과 비교해도 하등 손색이 없어 보였다.
더욱 재미있는 것은 동서와 남북으로 서로 교차하며 달리는 길에 각기 다른 이름이 붙어 있다는 것이다. 동양식으로 보면 ‘주작대로’라 할 수 있는, 남북으로 달리는 넓고 긴 길은 ‘데쿠마누스’, 동서로 달리는 길은 ‘카르도’라 했다. 그들의 세력이 미치는 곳이면 어김없이 길을 건설했을 정도로 ‘길의 천재’였던 로마인들인 만큼 달리는 방향에 따라서도 서로 다른 이름을 붙였던 것이다.
로마인들이 도시 내부에만 길을 건설한 것은 아니었다. 길과 길을 잇는 ‘길의 네트워크’까지 구축했다. 그리고 일정한 거리마다 ‘만시오’(mansio, 영어의 mansion은 여기서 나왔다)란 이름의 역정(驛亭)을 두었다. 아피아 가로를 건설한 이후 속주로 편입된 갈리아 지역(지금의 프랑스 일대), 북아프리카 해안지대, 그리고 서아시아 일대에 속속 포장도로를 건설함으로써 총 길이가 적도 둘레의 10배에 이를 정도가 됐다.
제라시를 떠나 북쪽으로 올라가면 만나는 다마스쿠스, 다시 그 북쪽의 알레포 등 옛 캐러반 도시들을 서로 이어주었던 ‘신트라야누스 가로’는 로마제국이 트라야누스 황제 시절 닦은 그런 길의 네트워크 중 하나로 지금도 사람과 물자를 실어 나르는 소임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다. 이 길은 실크로드와도 연결돼 중국과 로마제국을 이어주기도 했으니 길의 역사를 알지 못하고서는 세계역사를 말할 수 없다.
신트라야누스 가로가 달리는 시리아 땅에도 제라쉬 못지 않게 로마식 도로구조를 보여주는 고대도시 유적이 있다. 세 개의 아치형 문으로 이루어진 개선문과, 1100m 길이의 대열주도로, 그리고 길과 길이 만나는 곳에 세워진 네 개의 ‘테트라필론(탑문)’, 이렇게 길과 관련된 축조물을 자랑하는 팔미라(Palmyra)가 그것이다.
지금은 아무도 살지 않는 도시유적의 개선문에 새겨진 포도덩굴 문양은 선명했고, 9m 너비의 열주도로를 감싸고 있는 코린트식 돌기둥은 아주 강렬하게 다가왔다. 팔미라는 3세기 초 제노비아라는 걸출한 여군주가 등장, 그때까지 보호자 역할을 해주었던 로마에 반기를 들었다가 도리어 멸망의 비운을 맞았는데도 이렇게 곳곳에 로마의 흔적들을 남겨놓은 것이다.
길은 이곳과 저곳을 이어주며 공간상의 거리를 좁혀준다. 이를 통해 공간의 확장이 가능해진다. 건축과 조각에선 뛰어난 솜씨를 보여 파르테논과 같은 걸작을 남겼으면서도 토목기술에선 이렇다 할 성과를 내놓지 못했던 그리스인들은 아크로폴리스와 아고라(agora, 광장 겸 시장)라는 좁은 공간 속에 머물고 말았다. 삶의 영역을 크게 확장시키지 못했던 것이다. 이에 반해 로마인들은 그리스인들로부터 건축술을 받아들이긴 했으나 거기에 만족하지 않고 토목기술을 더하고 다시 대규모 토목공사를 가능케 하는 콘크리트 구조재(構造材)까지 발명해 ‘시간적 거리의 단축’을 이룩했다. 우리가 고속도로를 닦음으로써 전국을 일일 생활권으로 만든 것처럼 그들은 로마라는 도시국가에서 일약 로마제국이란 영역국가로 발돋움할 수 있었던 것이다. 길의 건설이 북아프리카의 무역국가 페니키아를 굴복시키기 위한 한니발 전쟁으로 시작된 그들의 정복전쟁과 괘를 같이하고 있어 이 같은 생각을 더욱 굳혀준다.
로마인들의 길 개념 속에는 사람과 물자가 소통되는 일상의 길 뿐 아니라 도시생활에 필요한 물을 공급해주는 수도교(水道橋)도 포함됐다. 수도교는 도시의 공간적 확장을 가능케 했다. 거대한 인공축조물인 수도교의 흔적은 스페인의 세고비아와 남프랑스의 님에 아직도 건재하므로 로마인들의 토목기술의 수준이 어느 정도였던가를 언제든지 확인할 수 있다.
그 시대 토목공학 기술은 요즘의 디지털 기술과 맞먹을 정도의 위력으로 역사를 변혁시켰다. 따라서 로마인들이 구축한 세계평화체제, 즉 ‘팍스 로마나’(Pax Romana)는 인터넷, 디지털기술에 의한 지금의 세계화 내지는 ‘팍스 아메리카나’(미국 주도의 평화구조)와 다를 바 없는 것이다.
참으로 묘한 것은 길이 만든 자의 의도대로 움직여주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로마는 한동안 이 길의 이점을 최대한 살려 지중해 일대를 제패하고는 지중해를 ‘마레 노스트룸’(Mare Nostrum), 즉 내해(內海)라 부르기도 했다. 하지만 그리스인의 헬레니즘, 유대인의 헤브라이즘, 기독교 등 속주의 토착문화가 바로 그 길을 타고 로마로 들어와서는 끝내 로마를 지배하고 말았다.
길과 수도교, 공공건물 등을 축조하고 또 정복전쟁의 승리로 광대한 영역, 다양한 민족을 거느리게 되었던 로마제국은 어쩔 수 없이 행정 법률체계를 정비하는 등 사회통합에 주력해야 했다. 그러면서도 피압박민족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황제숭배 등을 강요함으로써 쓸데없는 반발을 불렀고 결과적으로 각 민족의 개성을 살려내지 못해 새로운 가치창조에도 실패했다. 그리하여 자기의 정체성마저 잃게되면서 멸망의 길로 들어서고 말았다. 그렇다면 지구가 하나의 마을로 인식되는 세계화 시대인 지금,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권삼윤(문화비평가)tumida@hanmail.net
구독
구독
구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