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책]함정임 소설집 '당신의 물고기'

  • 입력 2000년 5월 19일 19시 48분


소설가 함정임(36)이 소설집 ‘당신의 물고기’(민음사)를 냈다. 1998년 9월부터 올 봄까지 문예지에 연재했던 일곱편의 중단편을 모았다. 촉망 받던 소설가 남편 김소진의 1주기 영정에 장편 ‘동행’과 소설집 ‘행복’을 바친 뒤 근 2년만이다.

전작에서 절망의 바닥을 쳤던 작가는 이제 희망의 부력을 얻은 듯하다. 질식시킬 것처럼 옭죄어오는 고통에서 작은 숨구멍을 찾고 있다. 바로‘상처와 더불어 살아가기’다.

등장인물은 모두 생의 상처나 죽음의 상흔에 시달리고 있다. 마음의 거처를 찾지 못하고 부유하는 미망인(‘검은 숲’), 남편의 죽음과 낙태로 죽음을 결심하는 아내(‘별은 빛나고’), 졸지에 두 아들을 잃은 시어머니(‘축제의 날과 같이’). 작가의 상처를 대리한 이들은 비련에 빠지지도 않지만 비명을 지르지도 않는다. 묵묵하게 생의 상실을 견뎌낼 뿐이다.

지난해초 쓰여진 권두작 ‘골프 클럽 파티’에서는 고통을 긍정하기에 이른다. 미나는 애정 없는 남편을 사고로 잃고 프랑스 파리로 도피한다. 우연히 참가한 파티에서 대학 단짝이었던 승희와 만난다. 화려하고 당당한 겉모습 속에 있는 깊은 상처를 품고 있는 인물. 미나는 승희가 밤중에 혼자 캠퍼스 광장을 달리는 모습을 알고 있다. 그로부터 7년이 지난 후, 남편과 사별한 승희는 파리에서 여전히 달리고 있었다. 예전보다 더 빠르게, 더 치열하게. ‘긴 머리를 휘날리며 롤러 블레이드를 타고 시내를 누비는’ 삼십대 중반 여성. 그 이미지는 미나로 하여금 고통을 인생 동반자로 택하게 만든다. ‘더 이상 상처받을 일도 원망할 일도 없이 십 년이고 삽십 년이고 살아가야 한다면 그보다 더한 지옥은 없을 것이다.’

작가는 “이 작품을 계기로 그간 나를 압도해왔던 남편의 그림자를 벗어나고 싶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가혹한 운명은 ‘문학적 홀로서기’를 쉽게 허락하지 않았다. 글을 발표한 얼마 뒤 마음의 버팀목이 됐던 친오빠마저 불의의 사고로 유명을 달리했기 때문이다.

그 뒤 몇 달간 작가는 집을 떠나 유목민처럼 떠돌았다. 마지막에 실린 중편 ‘당신의 물고기’는 ‘법구경’(法句經)’을 보며 평심을 수습했던 성찰의 기록이다. 사고사한 남동생의 아이를 밴 채 망자의 흔적을 떠도는 유치원교사와의 인연을 통해 스스로 생(生)의 화두를 던지고 있다.

그에 대한 응답은 최근작 ‘호수 저쪽’에서 보여진다. 애타게 그리움을 키웠던 남자가 후배의 애인이 된 것을 안 주인공은 회피하지 않는다. 와락 고통을 끌어안자 도리어 해방감을 맛본다. 마지막 독백은 작가의 결심으로 읽힌다. ‘그래, 이제 알 것 같다. 출구를 찾지 못할 때, 해결을 볼 수 없을 때는, 스스로 타오르며 해소되는 길도 있다는 것을.’

작가가 고통이 남김없이 타버린 재속에서 영롱한 생의 진신사리를 발견할 수 있기를….

<윤정훈기자> digan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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