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의 잿빛 풍경과 비인간적 삶 속에서 녹색의 공간과 여유를 잃지 않으려는 사람들은 자칫 오해와 비난의 대상이 되기 쉽다. 아파트에 초원을 키우는 이 작품의 주인공 역시 이혼과 이민이라는 근거 없는 소문 속에 주위로부터 소외되고 사회로부터 제외된다. 어느 날 그는 자신의 아파트로 -즉 자신이 창조한 초원의 공간으로- 이 소설의 화자인 작가와, 결혼에 실패한 화자의 옛 애인, 그리고 어린 창녀를 데려온다. 화자의 옛 애인은 이혼 후의 외로움에서 벗어나 모처럼의 담소를 즐거워하고, 어린 창녀 역시 사람들과 오순도순 앉아 술을 마시는 것이 기뻐서 눈물을 글썽거린다.
도심 속 녹색 공간은 이렇듯 좌절한 삶의 실패자들과 소외당한 사람들에게 다시 한번 인간애의 소중함을 상기시켜주고, 그들의 상처를 치유해주는 힘을 갖고 있다. 그러므로 화자가 주인공을 불러내어 예전에 즐겨 가던 극장을 다시 찾아가는 것이나, 옛 애인을 둘이 처음 만난 디스코텍으로 데리고 가는 것, 또는 예전처럼 그곳 화장실에서 다시 한번 섹스를 시도하는 것 등은 모두 잃어버린 녹색의 꿈을 되찾기 위한 상징적 기구(祈求)의 몸짓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은 모두 나름대로 자신만의 녹색의 꿈과 초원의 공간을 키우며 살고 있다. 이 소설의 화자 역시, ‘나 자신도 한때는 연애도 키웠고…옛 애인도 유치원생이 된 자식과 아이스크림 가게를 키우고 있었다’ 라고 말한다. 화자는 옛 애인의 아이를 ‘위대한 유치원생’ 이라고 부른다. 팔고 난 아이스크림은 덧없이 녹아버리지만, 자식은 옛 애인이 키우고 있는 변하지 않는 녹색의 초원이기 때문이다.
‘검은 초원의 한켠’은 또한, 작가가 창조하는 상상 속의 공간과 그 힘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로버트 쿠버의 ‘엘리베이터’를 연상시킨다. 그러나 일상의 공간과 기계적 반복을 상징하는 엘리베이터와는 달리, 백민석의 초원은 일상에서 일탈한 여유와 꿈의 공간이다. 그래서 쿠버의 주인공이 마지막에 엘리베이터를 벗어나는 것과는 달리, 백민석의 주인공은 초원을 더 키우고 더 넓히기로 결심한다.
맨 바닥에 카펫만 깔려있을 뿐, 사실 주인공의 아파트에는 소파도, 오디오도, 벽장식도, 또 천장의 조명기구도 없다. 그러나 설계사인 주인공은 상상력을 통해 그곳에 아름다운 녹색의 초원을 만들어낸다. 그것은 물론 예술가가 만들어내는 가상의 공간이지만, 오히려 현실보다 더 절실하고, 더 소중하며, 더 강력한 힘을 갖는 영혼의 공간이 된다. 잃어버린 녹색의 꿈을 되찾아야 한다는 인식을 공유한다면, 우리 모두는 자신만의 녹색의 공간을 창조할 수도 또 간직할 수도 있다. 그 공간은 물론 키울 수도 있고, 넓힐 수도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결국 상상력과 인식의 소산이어서, 우리 인식의 확대에 따라 얼마든지 확장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소설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마지막에 화자가 떠나고, 대신 주인공이 화자의 역할을 맡아 이야기를 마무리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독자들은 이제 화자의 시각이 아니라, 주인공의 시점으로 그 초원의 공간을 바라보게 된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소문으로만 듣던 그 가상의 공간은 비로소 리얼리티의 힘을 얻게 된다. ‘검은 초원의 한켠’은 비인간적인 도시에서 일과 일상에 쫓기는 현대인들이 상실한 목가적 꿈의 소중함을 다시 한번 상기시켜준다는 점에서 분명 ‘작품 속으로’ 들어가 볼 가치가 있는 작품이다.
김성곤(서울대교수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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