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도 상당수가 “팔불출이나 하는 짓”이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게다.
그런 점에서 민경희씨(미국명 크리스틴 박·나이는 밝히기를 거부)가 38년전 남편 박노순씨(56)를 만난 것은 한국여성으로선 잡기 힘든 행운이었다.
민씨는 지난해말 IBM 중역자리에 올라 일본 도쿄의 아시아태평양본사 신규사업담당 총괄책임자로 부임한 ‘무서운 동양여자’. 그 뒤에는 아내를 위해 승진을 마다해온 남편의 전폭적인, 그리고 눈물겨운 지원이 있었다. 그는 같은 직장에서 아내보다 직급이 낮은 ‘시니어 매니저’로 있다.
▽유학길에 첫 만남〓민씨가 그를 처음 만난 것은 1972년 서강대 영문학과 졸업 직후 떠난 미국 유학길에서. 뉴욕행 비행기안에서 아는 사람의 소개로 인사를 나눴다. 작고 깡마른 체구에 ‘똑소리 나는 여자’를 보고 박씨는 첫눈에 반했다.
미국에 먼저 유학와 뉴욕주립대에서 전자공학을 공부했던 박씨는 비행기안에서 줄곧 민씨의 장래에 대해 조언했다.
“여성이 능력을 발휘하기 쉬운 분야가 따로 있습니다. 회계학이나 도서관학 병원행정학을 공부하세요.”
텍사스대에서 사회학을 전공하려던 민씨는 6개월후 뉴욕 근처 페어리디킨슨대로 옮겨 회계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만난지 1년만에 결혼식을 올렸다.
“회계학 MBA를 마치고 회계회사에 취직했죠. 일을 시작하니까 회계직원보다 대우가 좋은 공인회계사(CPA)가 부러워졌어요. 남편이 말하더군요. 당신이 CPA에 도전하면 되잖아.”
민씨는 이듬해 아들을 낳은 뒤 1년만에 자격증을 땄다. 뉴욕서 CPA를 따낸 첫 한국여성이었다.
▽아내의 성공이 기쁘다〓줄곧 박씨가 아내를 이해하고 도왔지만 민씨도 양보한 적이 있다. 뉴욕도심에서 교외에 자리잡은 회사까지 자동차로 왕복 세시간 걸리는 거리를 출퇴근하는 남편이 안스러워 82년 남편회사인 IBM으로 직장을 옮긴 것.
그것이 전화위복이었다. 민씨는 재무 회계를 맡으면서 발군의 능력을 발휘했다. “어떤 회계보고서라도 그를 거치면 100% 믿을수 있다”는 평가를 받았을 정도.
“행복하게 일하는데 4년전 시애틀IBM에서 시니어매니저로 승진해 와달라는 제의를 받았어요. 시애틀은 뉴욕에서 비행기로 6시간 걸리고 시차가 3시간이나 나는 곳이어서 망설일 수 밖에 없었죠.”
그러자 남편이 아내를 떠밀었다. “당신이 자랑스럽다. 기회는 다시 오지 않는다”며. 그리고 아들과 둘이 뉴욕에 남아 자취생활을 했다.
민씨가 1년간 주말마다 뉴욕과 시애틀을 오가며 힘들어하자 이번엔 박씨가 시애틀IBM으로 자원해 따라가기로 했다. 뉴욕에선 시니어매니저 승진을 눈앞에 두었지만 미들 매니저로 수평이동한 것. 이때부터 아내와 남편의 직급이 벌어지게 됐다.
▽만약 한국에 살았다면〓지난해 일본 지사로 부임하는 아내를 따라 도쿄에 온 것도 한국 남자들이 볼때는 ‘속터지는 일’일게다. 사실 이들 부부는 지금껏 한 직장에서 있으면서도 업무가 달라 마주치는 일이 없었다. 그러나 도쿄에서는 업무의 연관성 때문에 자주 회의를 함께 한다.
이때마다 박씨는 민씨가 곤란하지 않도록 ‘상사 아내’를 깍듯이 모신다. “부부가 함께 근무한다는 것보다 더 좋은 게 있느냐”면서.
남자들도 되기 어렵다는 IBM의 중역. 만약 이들이 한국에 살았어도 민씨가 그 자리에 오를 수 있었을까.
우선 한국기업에선 여성임원은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다. 반면 IBM은 여성이 전사원의 28%, 임원의 18%나 된다. 그만큼 여성이 능력을 발휘할 기회가 열려 있다.
그러나 이런 체제 문제보다도 한국에서 ‘여성의 출세’를 막는 것은 ‘남성의 우월의식’이라고 박씨는 지적한다.
“남자건 여자건 유능한 사람이 능력을 발휘해야지요. 한국 사람들은 남편이 아내보다 나아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너무 심해요. 만약 저도 한국에 살았다면…글쎄요. 가족이나 동료들의 눈총에 못이겨 아내의 능력을 묻어버리고 앞길을 막았을지도 모르지요.”
<도쿄〓이영이특파원> yes202@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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