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 e가족]일본 반쇼-하야시부부

  • 입력 2000년 5월 28일 20시 55분


“돈 못벌고 키 작아도 좋다. 애 잘보고 집안일만 잘 돕는다면….”

일본 신세대 여성의 ‘신랑감을 고르는 기준’이다. 너무 심한 것 아니냐고?

천만에! 일본의 아사히신문은 최근 특집기사 ‘3고(高)에서 3C의 시대로’에서 변화하는 일본 젊은 여성들의 결혼관을 보여줬다.

후생성이 미혼여성 52명에게 ‘신랑감의 조건’을 물어봤더니 편안하고(Comfortable), 가치관(또는 말)이 통하며(Communcative), 가사를 잘 도울 것(Cooperative) 등 3C를 꼽았다. “지금까지 일본 여성들이 결혼조건으로 내걸었던 고신장(高身長), 고학력, 고소득의 3고는 급격히 무너지고 있다”고 이 신문은 분석했다.

여성들의 기세가 이처럼 드높아진 이유는 간단하다. 디지털시대의 도래. 성별보다 경쟁력이 우선시되는 세상에서 능력있고 적응력 강한 여성들은 자꾸 일터로 나갈 수 밖에 없다. 미국의 시사주간지 뉴스위크는 지난달 ‘여성 투사들’이라는 커버스토리를 통해 “신(新)경제가 일본의 여성들을 자유롭게 해주고 있다”고 썼다.

“나는 작년 11월말 출산해서 육아휴직 중이다. 임신 사실을 알고는 일과 육아를 양립할 수 없을 것 같아 불안했다. 출세할 수 있는 ‘종합직’에 어렵게 합격했는데…. 남편과 상의해 남편이 육아를 분담하는 조건으로 아이를 낳기로 결정했다.…기저귀를 갈아주고 이유식을 만들고 아이와 놀아주는 게 아내만의 일이었던 시대는 지났다.”

1월29일 일본 아사히신문에 실린 독자투고다. 이를 투고한 하야시 아키코(26)를 만나보기로 했다. 그는 도쿄 시내에서 북동쪽으로 100㎞쯤 떨어진 이바라키현 우시쿠시(市)에 살고 있었다.

그의 남편 반쇼 도시히로(25)는 석달전 사내 커플인 아내를 위해 육아휴직을 신청했다. 인쇄기 제조업체로 총 직원이 1500여명인 ‘리소(RISO)’사에선 사상초유의 일. 1992년 남편의 육아휴직이 법적으로 인정된 일본에서도 남편의 휴직은 그리 흔한 일이 아닌 모양이다.

맞벌이부부라 오후 늦게 방문한 날, 아키코가 다과를 준비하는 동안 남편은 소독해놓은 젖병에 보온물통의 뜨거운 물을 3분의 1쯤 넣고 분유를 2스푼 넣어 탄 뒤 200㏄까지 마저 물을 붓고 찬물로 식혔다. 능숙했다.

“아이를 맡아줄 보육원엔 4월에나 자리가 난다고 하는데 아내는 이미 산후조리휴가와 육아휴직으로 3개월이나 일에서 떠나 있었어요. 휴직기간을 늘리면 일에 대한 감각을 잃을까 걱정하더군요. 두 사람의 아이인데 아내에게만 부담을 줄 수는 없어 내가 쉬기로 했어요.”

반쇼의 설명. 같은 연구직인 그는 일에서 오래 떠나 있으면 뒤처지는게 아닐까, 하는 아내의 두려움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사내 처음으로 육아휴직을 신청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특히 나이든 상사는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며 싫은 표정이 역력했다. 반면 같은 또래 동료들은 잇따라 육아휴직을 신청해 부담을 덜어줬다.

반쇼부부는 4월부터 함께 직장에 나가며 ‘당번’을 정해 육아와 가사를 분담한다. 오전 6시반에 일어나면 남편은 습관처럼 아이의 기저귀를 살피고 체온을 재며 아이에게 아침을 먹인다. 그동안 아내는 아침식사를 준비한다.

매주 바뀌는 당번의 역할은 아침에 보육원으로 아이를 데려다주고 오후 7시엔 찾아오는 일. 급한 일이 있어 못할 땐 사내 E메일로 연락하기로 돼있다. 그러나 아직은 누구도 당번일을 소홀히 한 적이 없다.

“처음엔 남편이 먼저 퇴근해 아이와 놀면서 설거지를 하고 있는 걸 보면 미안했어요. 하지만 결국엔 이게 우리가 살아가기 위한 생활의 방식이란 결론에 도달했죠.”

아키코의 말. 그의 친정어머니는 경제권을 지녔다는 이유로 집안에서 ‘군림’하던 아버지 때문에 마음고생하다 40이 넘어 사회생활에 뛰어들었다.

반쇼는 “이젠 육아나 가사가 ‘일상’이 돼 아내를 돕는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저 이 일이 내 일이거니 생각한다”고 말했다. 반쇼처럼 아이를 돌보다 데리고 외출하는 아빠들을 위해 일본에선 기저귀가는데 쓰는 아기침대를 설치한 남자화장실이 늘고 있기도 하다.

젊은 아빠 엄마는 말했다.

“두 사람이 ‘공동체’로 살아가기 위해선 어떤 영역이든 한 사람에게만 부담을 줘서는 안된다고 생각해요. 그것이 가사든 또 아든 경제적 부담이든지요.”

<도쿄·이바라키〓이나연기자>larosa@donga.com-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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