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동남아 등에서 수입한 싸구려 원료로 만든 약들이 아무런 여과 과정을 거치지 않고 환자들에게 투약되고 있다.
제약회사들은 약효가 떨어지고 부작용이 날 수 있음을 알면서도 값싼 원료로 약을 만들고 있으며 약사들도 이 약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알면서 환자에게 조제 판매하고 있다.
식품의약품안전청에 등록된 국내 제약업체는 629개. 이들은 연간 10조원의 시장을 놓고 경쟁을 벌이고 있다. 하지만 돈이 많이 드는 신약개발은 엄두도 내지 못하고 카피 약을 만드는 데만 몰리고 있다. 카피 약도 제대로 만들려면 막대한 비용이 들기 때문에 ‘저질 원료’로 가격경쟁을 벌이고 있다.
▼'한국 카피藥 천국' 오명▼
국제 제약업계에서는 ‘한국은 카피 약의 천국이며 이 카피 약은 아무 재료로 아무렇게나 만들어도 된다’고 알려져 있을 정도다.
국제 원료시장에는 소화궤양치료제인 라니티딘을 비롯해 성분은 같아도 가격이 10배 이상 차이나는 원료가 숱하다. 의약품수출입협회 관계자는 “원료 수입가는 대외비여서 공개할 수 없지만 같은 성분에 최대 100배의 가격차가 나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국내 제약업계에선 어떤 성분의 약이 원료값에 비해 ‘장사’가 된다고 알려지면 영세 제약업체들이 우르르 시장에 몰린다. 해열제인 메페나믹산제제는 한때 100여곳에서 만들었고 해열진통제인 아세타미노펜도 30여곳에서 만들었다.
제약회사들의 헐값 경쟁의 피해는 곧바로 국민에게 되돌아간다. 헐값의 약들은 우선 순도가 크게 떨어진다. 의학적으로 순도가 99.8%에서 97%로 떨어지면 약효는 절반으로 떨어진다. 미국산이 순도가 99.8%라면 중국 인도 등에서 수입한 원료로 만든 약들은 97% 이하가 많다. 일부 싸구려 원료로 만든 약 중에는 약효가 거의 없는 것도 있다.
▼불순물 포함 약효 상실▼
값싼 원료로 만든 약들은 불순물 때문에 부작용이 우려되는데다 유효기간도 짧아 수입 통관된 이후 제조과정을 거쳐 만들어진 약을 환자가 먹을 때면 이미 약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한 경우가 적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서울 강남의 한 약국에서 환자를 보고 있던 약사 A씨(42·여)는 “성분명이 같아도 약마다 약효가 다른 것은 확실하다”면서 “심지어 캡슐을 열어보면 양이 제대로인지 의심되는 약도 있고 같은 약이라도 제조회사가 다르면 처방해야 할 약 알 수가 다르다”고 말했다.
약사들이 꺼려하면서도 싼 약을 조제하는 이유는 ‘경영상 이유’ 때문.
약사들이 약품도매상으로부터 구입하는 약값은 같은 성분이라도 심하면 10배의 차이가 난다. 독시사이클린 성분의 항생제 바이브라마이신의 경우 100㎎짜리 100캡슐 한 통이 3만3000원이지만 같은 성분의 카피 약들은 4500원 정도. 라니티딘 성분의 소화궤양 치료제 잔탁의 150㎎짜리 60캡슐은 3만5000원이지만 이 값이면 똑같은 성분의 ‘B급’ 다섯 통은 넉넉히 살 수 있다.
이 같은 결과는 보건당국이 국민 보건보다는 제약업체와 약사의 권익을 우선해왔기 때문. 이는 결국 제약업체 경쟁력도 떨어뜨리고 국민건강도 크게 손상시키는 결과를 빚고 있다. 이와 관련해 약효동등성시험에 통과할 수 없는 의약품을 만들어온 상당수의 소규모 업체들은 의약분업이 실시되면 더 이상 의약품제조가 불가능한 것으로 내다보고 대책마련에 고심하고 있다. 이들 업체는 건강보조식품 등 약효시험 없이도 생산 가능한 의약부외품을 제조하는 방향으로 업종 변경을 검토하고 있다.
31일 오후 35개 중소제약업체의 공장이 밀집해 있는 경기 화성군 향남면 향남제약공단.
▼업체 30%이상 퇴출 예상▼
이곳에선 의약분업을 앞두고 썰렁한 분위기. 지금까지 소화제 등 10여가지 제품을 만들어온 한 영세업체는 지난달부터 생산량을 줄이면서 기존의 설비를 활용해 건강식품을 생산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었다.
향남제약공단조합 강경구(姜慶求)차장은 “아직 생산을 중단한 곳은 없지만 지난달부터 출하량이 많이 줄어드는 업체들이 늘고 있다”고 말했다.
이곳의 제약업체들 중 비교적 규모가 큰 대웅 진로 한화 등의 관계자들은 “사실상 약효가 없는 의약품들로 인해 많은 돈과 비용을 투자해 제대로 된 제품들을 만들어온 업체들이 상당한 피해를 봐 왔다”며 “국내 업체 중 3분의 1 가량은 퇴출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성주기자·화성〓남경현기자>stein33@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