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제 서품 50주년 최석우신부 "제사금지-신사참배 교회탓"

  • 입력 2000년 6월 1일 19시 30분


한국교회사 연구의 ‘큰 산’인 최석우(崔奭祐·78)신부가 사제로 서품된 50주년을 기념하는 금경축(金慶祝) 미사가 1일 오후 명동성당에서 열렸다.

그가 사제로 서품된 것은 한국전쟁이 터진 50년. 전쟁이 끝난 직후인 53년 12월 벨기에 루뱅대학으로 유학을 떠나면서 시작된 최신부의 한국천주교회사 연구도 47년째를 맞았다.

그의 대표적 업적은 황사영(黃嗣永) 백서(帛書) 진본과 김대건(金大建)신부가 제작한 조선전도(朝鮮全圖)를 각각 로마와 파리에서 찾아내고 구한말과 일제치하 조선교구장을 지낸뮈텔 주교의 일기를 정리해 공백으로 남아있던 일제시대 천주교회사 정리에 기여한 것이 꼽힌다.

동갑내기로 평소 남달리 가까운 사이였던 김수환(金壽煥)추기경은 최신부의 금경축에 참석, “최신부님은 ‘한국 교회의 국보’”라고 치하했다.

김추기경이 최근 유학자인 심산 김창숙(心山 金昌淑)선생의 묘앞에서 재배를 드린 것에 대해 최신부는 ‘교회사적 입장’에서 이를 지지했다.

“조상제사 금지와 병인양요(丙寅洋擾), 일제하 민족운동 금지, 신사참배 허용 등 4가지는 천주교회가 민족앞에 사죄해야 할 것들입니다. 유교의 제사에 미신적 요소가 들어있었던 것이 사실이지만 모든 것이 세속화하는 과정에서 이런 요소가 다 사라졌어요. 천주교가 조선에 들어왔을 당시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은 이미 합리화된 효의 형태로 제사를 이해하고 있었으니까요.”

한국천주교회사의 텍스트는 아직도 프랑스 신부 샤를르 달레가 쓴 ‘한국천주교회사’로 최신부는 이 책의 역자중 한사람이다.

달레는 조선에 와 본적이 없다. 조선에 거주하던 다블뤼 주교의 비망기와 선교사의 서한을 인용, 책을 썼다.

“달레가 익숙하지 않은 한국의 지명 인명을 옮기면서 다블뤼의 비망기를 잘못 기록한 부분이 많습니다. 가령 공주와 홍주의 차이는 K와 H의 차이에 불과하죠. 필기체로 썼을 경우 구별이 어려워 잘못 인용하기는 더욱 쉽습니다. 하지만 순교자의 성명 출생지 체포지 등을 정확하게 하는 것은 시복시성(諡福諡聖)과도 연결되는 중요한 작업입니다.”

최신부는 ‘다블뤼가 달레보다 역사의식과 방법이 앞섰다’는 생각으로 아직도 다블뤼 비망기의 원본을 찾는 작업을 포기하지 않고 있다.

천주교회사 연구에 특히 치밀한 역사의식과 방법이 요구된다. 누구를 성인이나 복자로 인정할 것인가 하는 문제로 직결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는 그는 1984년의 103위 시성절차를 1925년의 79위 시복절차와 비교하면서 날카롭게 비판했다.

“25년 시복은 수십년간의 자료수집과 증언청취를 통한 교회사 연구의 심화와 함께 이뤄진 것인데 비해 84년 시성은 철저한 사료비판이라는 교회사적 밑받침없이 정치적으로 이뤄졌습니다.”

최신부는 달레의 저서를 대체하는 한국천주교회의 새로운 통사를 쓸 자격을 갖춘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현재 서울 명동 가톨릭회관에 있는 한국교회사연구소에는 바티칸에 막대한 돈을 주고 복사해온 A4 용지 5만장 분량의 사료가 그의 연구를 기다리고 있다. 50년 신부생활의 대부분을 사목활동보다는 ‘말없는 사료(史料)와의 외로운 싸움’으로 보낸 최신부. 노령에도 불구하고 홀로 35년째 살아온 초라한 합정동 사택에서 오전 11시 출근하고 오후 6시 퇴근하는 생활을 반복하며 연구에 전념하고 있다.

<송평인기자>pis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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