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책]'시간박물관'/인간은 시간을 만들고…

  • 입력 2000년 6월 2일 19시 04분


▼시간박물관 움베르토 에코·에른스트 곰브리치외 지음/푸른숲펴냄▼

초기 기독교도들을 ‘시험에 들게 한’ 문제는 다름아닌 시간의 창조였다. ‘하느님이 천지를 창조할 때 시간 속에서 창조했을까, 아니면 만물을 창조하기 전에 공간과 시간의 모체를 먼저 창조했을까’. 수세기간 지속된 이 논쟁의 답이 궁금한가? 그러나 서둘러 답을 찾기 전에 질문 자체를 되물어보자. 왜 서양인들에게는 그렇게 ‘순서’를 부여하는 일이 중요했을까?

만약 당신이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의 ‘알티에렝게 (Altyerrenge)’의 시간관으로 유체이동할 수 있다면 기독교인들의 이 직선적인 시간관은 참으로 이해하기 힘든 사고방식이 된다. 영어로는 ‘드림타임(Dream Time)’으로 해석되는 알티에렝게는 과거이자 현재이며 미래다. 드림타임 시대의 선조들은 살아있는 사람들을 위해 선례를 마련해주었고 현재의 삶은 그 선조들을 길잡이 삼아 그들의 발자국을 따라가는 것일 뿐이다.

이 책 ‘시간박물관’은 이처럼 인류가 시간을 지각한 이래 문화권별로 당대 사람의 의식을 지배한 다양한 시간관과 시간의 측정, 묘사, 체험등을 311장의 사진 그림과 함께 소개한 책. 역사학 미술학 박물관학뿐만 아니라 천문학 의학 음악까지 다양한 장르의 시각으로 접근했다. 밀레니엄 전환기를 앞두고 1999년 영국 그리니치천문대와 국립해양박물관이 공동전시회를 기획하며 도록 성격으로 기획한 책이다.

인간이 그토록 시간에 관심이 많은 이유는 아마도 영국박물관에 소장된 페리에의 동판화 ‘큐피드의 날개를 붙잡고 있는 시간 영감’속에 압축될 것이다. 시간을 관장하는 늙은 시간영감이 사랑의 신 큐피드의 날개를 잘라버리는 장면. 페리에는 그림 밑에 ‘사랑은 모든 것을 정복하지만 시간은 사랑을 정복한다’는 글을 덧붙였다. 시간에 지배당하지 않고 지배하고 싶다는 욕망은 ‘영생(永生)’을 꿈꾸다 이카루스처럼 추락한 숱한 인물들을 통해 증언된다.

이제 인류는 유전공학으로 시간의 지배에 다시 도전하고 있다. 수리물리학자와 양자우주론자들의 지적 모험을 통해 ‘태초’, 즉 우주생성의 빅뱅(Big Bang)이 있었던 플랑크타임(10-⁴³의 1초)부터 첫 밀리세컨드(1000분의 1초)까지의 시간까지 추적하게 됐다. 그것은 이 우주가 과연 언제 어떻게 종말을 맞이할 것인지 미래에 관한 답을 풀어가는 것이기도 하다.

이 책은 굳이 앞에서 뒤로 읽어갈 필요가 없다. ‘의학과 시간’ ‘지질학자의 시간’등 한 장씩 골라읽는 게 무난하다. 긴 사진설명만 따로 꼼꼼히 읽는 것도 책을 즐기는 방법.

에코, 곰브리치, 론 캠벨, 크리스틴 리핀콧 등 쟁쟁한 학자 24인이 필진으로 참여해 문화상대주의적인 태도로 ‘시간의 집대성’을 시도했지만 아시아 남미 오세아니아의 시간관에 대한 기술이 평면적이라 전체적으로는 ‘서구 기독교 중심의 시간박물관’에 머무른다. 올컬러 특수양장. 책값을 4만9000원으로 책정해 기획단계부터 화제가 됐다. 307쪽. ‘번역가’ 김석희 옮김.

<정은령기자>ry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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