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6년, 작곡가 푸치니는 앙리 뮈르제의 희곡에 곡을 붙인 오페라 ‘라 보엠’을 선보였다. 오페라는 파리를 배경으로 가난한 예술가들의 패기와 치기, 사랑과 자유를 묘사해 인기를 끌었다. 폐병걸린 애인을 두고 속수무책인 시인, 아내와 싸움질만 하는 화가, 단벌 외투의 철학자…. 철없고 삶의 계획도 없어보이는 이들은 자신의 작품이 미래의 예술을 구원할 것으로 믿는다. 그 꿈은 이루어질까.
20세기의 개막, 한 번의 전쟁, 또다른 세계대전의 그림자가 드리우는 1930년대 까지. 소설가 프랑크의 ‘보엠’은 새로운 시대의 파리 예술가 집단을 인물과 일화 중심으로 만화경처럼 펼쳐낸다. ‘소설’이라지만 사실에 접근한 논픽션에 가깝다.
저자의 시선에 붙잡힌 예술가들은 피카소나 아폴리네르 정도를 빼면 당대에는 무명이나 마찬가지. 그러나 그들은 20세기의 미의식을 규정한 파이오니어들이었다. 화가 모딜리아니 브라크 마티스, 문인 아라공 콕토 브르통 등이 한정된 시대와 공간을 빠져나와 세기의 거장으로 자리잡았다.
예술가들의 치기와 기행(奇行)은 오페라속의 ‘보엠’(Boheme·구속받지 않는 기질을 가진 예술가족속)과 매한가지다. ‘우수(憂愁)의 시인’으로 알려진 아폴리네르는 친구들과 먹기내기로 하루를 보냈다. 마약도 이 ‘자유인’들에게는 천국으로 향하는 안내장과 같았다.
예술가들의 자존심 경쟁도 개인적 차원에서는 때로 ‘유치하기’ 짝이 없다. 마티스는 피카소의 ‘아비뇽의 처녀들’을 자신에 대한 도전이라고 생각했다. 마티스가 피카소에게 딸의 초상을 선물하자 피카소 친구들은 그 초상화를 다트놀이판으로 사용했다.
그리고 몽마르트르 시민들에게 복권 사기극을 펼친 조각가 마롤로, 창녀에게 신의 복음을 전도하다 기둥서방에게 얻어터진 시인 막스 자코브…. 상상력으로 무장한 예술가들의, 기묘하고 귀엽기까지 한 행동은 구속받지 않는 이들의 영혼을 나타내는 징표.
기존의 질서가 항상 예술가들에게 관대한 것은 아니었다. 화가들에게서 ‘어머니 베유’라는 별명을 얻었던 화상(畵商) 베유는 당시로서 ‘전위’예술가였던 모딜리아니의 전시회를 열고서는 부르조아들의 야유를 들으며 거리를 지나야 했다. 경찰서장은 “이 나체화에는 털이 보이잖아!”라는 이유로 전시회를 문닫게 만들고 말았다. 낭만주의적 미학으로 무장한 평론가들의 따가운 독설도 예술가들이 헤쳐나가야 하는 가시덤불과 같았다.
그러나 단지 천재들의 일화로 수놓은 ‘전기주의적’ 텍스트로만 이 책을 이해해서는 안된다. 인상파, 입체파, 야수파 등 숨쉴 틈 없이 분출하며 20세기 예술에 심대한 영향을 끼친 예술 사조들의 복잡한 가닥을 저자는 간명한 도해(圖解)를 보듯이 정리해준다.
책의 주제에 흥미를 느낀 독자라면, 연초 발간된 ‘피카소와 함께 한 어느날 오후’(시빌구)가 세기초 예술가들의 탐색에 도움을 줄 것이다. ‘보엠’이 연대기라면, ‘피카소…’는 그 연대기를 한순간에 잘라 신선한 속살을 노출시킨 스냅 사진과도 같다. 박철화 옮김. 326쪽 1만원. 6월중 2,3권이 완간될 예정.
<유윤종기자>gustav@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