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원재길의 두 번째 소설집 ‘벽에서 빠져나온 여자’를 가득 채우는 풍경들이다. 환상과 리얼리티의 경계를 쓱쓱 지워버린 뒤 낯선 알레고리(寓意)의 세계로 지면을 가득 채우는 그의 솜씨는 앞서 선보인 장편 ‘모닥불을 밟아라’나 작품집 ‘누이의 방’과 다르지 않다.
▼문단 내부풍경도 풍자▼
이번 작품집에서 한층 눈길을 끄는 것은 현실을 붕괴시키며 얻는 풍자가 문단의 내부 풍경에도 손길을 미친다는 점. ‘신종 바이러스에 대한 보고서’에서는 문인들이 ‘폭로증 바이러스’에 집단적으로 감염된다. 독재정권과의 야합도, 남녀사이의 치정도 남김없이 고백 내지 폭로해야 하는 집단감염을 바라보며 작품 속의 ‘본인’은 “이 나라의 문필가 가운데 3분의 1은 확실히 이 바이러스에 감염된 상태”라고 꼬집는다. ‘손’에서 거짓말을 할 때마다 자기 손에게 얻어맞고, 거짓말은 쓸 수 없게 된 주인공 역시 작가다. 그는 여자의 대필 덕에 작가 행세를 하면서도 여자를 배반한 파렴치한으로 드러난다.
▼"애정의 다른 표현일뿐"▼
그러나 작품 밖에 선 작가는 ‘꼬집어 본 풍경도 결국 애정의 다른 표현’이라고 의뭉을 떤다. “모독과 능욕이 중심 테마로 다루어진 작품이 절반이 넘었다. 자연 많은 인물이 욕먹고 얻어터지며 고초를 겪었다. 애정을 그런 식으로밖에 드러낼 수 없으니 작가란 고약하면서 딱한 존재가 아닐 수 없다….”
작가 이윤기는 “한계로서 벽은 누구에게나 존재한다. 수 많은 소설가들이 벽 같은 것은 없는 듯이 쓰고 있는 시대에, 그가 벽을 뚫고 지나갈 방법을 모색하고 있다는 데 축하를 보낸다”고 발문에 썼다.
<유윤종기자> gustav@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