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년 췌장이식수술 이후 복용한 면역억제제로 신장이 망가지기 시작한 이씨. 99년 11월 서울중앙병원에 신장이식을 신청했을 때까지만 해도 “6개월 안에 이식을 받을 수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는 담당의사의 말에 희망이 부풀었다.
그러나 정부가 2월부터 ‘장기이식에 관련된 뇌사자 장기이식법’을 시행하면서 이씨에게는 뜻하지 않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법 발효 다음달 병원측이 이씨에게 “새로운 대기순서에 따라 앞으로 5년이상 기다려야 할 것”이라고 통보했기 때문. 병세가 이미 악화된 이씨에게 이는 사형선고나 마찬가지였다.
서울대 토목학과를 졸업하고 대학원까지 졸업한뒤 올해 미국 대학에 박사과정 입학허가를 받은 이씨는 “법이 시행되지 않았다면 이번달에 신장이식 수술을 받고 9월 미국으로 떠날 예정이었는데…”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청천벽력과 같은 이같은 일이 일어난 것은 장기 이식법 시행으로 전국을 3개 권역으로 나눠 장기 기증과 이식수술을 통합관리하게 되면서 기존의 병원별 대기자 순서가 무효화된 탓이다.
사랑의 장기기증운동본부 본부장 박진탁(朴鎭卓)목사는 “법 시행으로 예전에 장기이식수술을 활발히 시행했던 병원의 환자들은 대기순위에서 손해를 보는 반면 상대적으로 시술이 적었던 병원의 환자들은 혜택을 보는 현상이 생기고 있다”고 말했다.
서울중앙병원의 한 관계자는 “대기자명단이 전국적으로 관리되기 시작한 후 자기 병원에서 나온 기증 장기가 다른 병원으로 가는 경우가 다반사”라고 말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이전에 이식수술을 위해 적극적으로 장기 기증을 권하던 병원들도 소극적인 자세로 바뀌면서 장기 기증마저 크게 줄어들고 있다. 실제 이씨가 입원해 있는 서울 중앙병원의 경우 지난해 매월 14건에 이르던 장기이식 수술이 법 시행 이후에는 한달 평균 3∼4건에 그치고 있다.
여기에 새로 시행된 뇌사자 장기이식법이 까다로운 절차 등을 요구하는 것도 일선병원들의 장기 이식에 대한 열의를 떨어뜨리고 있는 요인.
한 종합병원의 장기이식 관계자는 “병원들의 업무 폭증은 그렇다 하더라도 장기기증에 대한 홍보는 이 사업에서 무엇보다 중요한데도 전국의 장기이식업무를 통합 관리하는 국립장기이식관리센터(KONOS)측은 이전의 병원들에 비해 홍보를 게을리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KONOS측은 “4,5월에 실적이 저조했던 것은 법 시행 초기이고 원래 계절적으로 장기 기증이 적은 때이기 때문”이라며 “내년 예산을 정하고 전산시스템을 보완하느라 홍보에는 미처 신경을 못쓰고 있는 것은 사실”이라고 말했다.
<최호원기자>bestiger@donga.com